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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들에서 떠났네 / 나희덕

우리는 들에서 떠났네 / 나희덕

우리는 들에서 떠났네 그래서 언덕 밑, 다리와 성벽 그늘에 이부자리를 폈네 토굴 속 어둠을 밝히어놓은 등잔, 그 흔들리는 불빛 아래 쪼그리고앉아 숙제하고 있는 아이들의 눈빛, 아이들은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의 마지막 뿌리라네

저녁이면 붉은 눈망울로 우리 거기 모이나니 우리의 등뒤로 저녁노을에 젖은 구름떼가 흘러가네 우리가 치고 있는 가난의 양떼는 누구의 것일까 때가 낀 얼굴과 손들, 젖은 양떼의 냄새, 우리는 들에서 떠나와 또 어디로 흘러가야 하는 것일까

토굴 속은 온통 개구리 울음소리로 가득하고, 논둑을 걸으며 개굴개굴 흉내내던 철없던 시절의 단꿈을 꾸네, 그러나 이윽고 논밭이 쩍쩍 갈라지는 꿈, 천정에 우르릉 금이 가기 시작하고 포크레인이 걸어들어와 우리의 꿈자리마저 덮치네

잠든 얼굴 위로 흐르는 식은땀을 씻어내리다 보면 어느새 천정에 흐르던 어둠도 가시고 세상이 보이기 시작하네 꿈인 듯 멀리 들판이 보이네 들에서 떠나 어디론가 밀려가는 우리의 옷자락이 보이네

『뿌리에게』1991, 창비시선 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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