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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그녀가 증언한 세상

케테 콜비츠, 그녀가 증언한 세상

등록 : 2008.11.10 14:38수정 : 2008.11.10 14:48

 

직조공의 행진 – 자신의 권리를 되찾으려는 직조공들의 표정과 동작이 선명히 드러나 있는 작품이다. 노동자의 삶과 투쟁에 포커스를 맞춘 연작은 독일사회에 커다란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여인, 케테 콜비츠

“나의 작품행위에는 목적이 있다. 구제 받을 길 없는 이들, 상담도 변호도 받을 수 없는 사람들, 정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이 시대의 인간들을 위해 나의 예술이 한 가닥 책임과 역할을 담당했으면 싶다.”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1867~1945), 나의 기억 속에 그녀는 거룩한 영혼이다. 그녀를 보면 광주민중항쟁을 주제로 민중의 고난과 정의의 역사를 그린 홍성담 화백이 연상되고, 제주4.3민중항쟁 때 동백꽃처럼 스러져간 섬사람들의 붉은 함성을 그린 강요배 화백을 만나게 된다. 때로는 그녀에게서 혁명전사 김남주가 보이고, 프란츠 파농이 보이고, 파블로 네루다가 보인다.

그녀는 한 시대를 뜨겁게 살다간 예술가였다. 시대의 벼랑 위에서 가난한 이들과 민중의 아픔을 작은 알몸 하나로 껴안았던 풀잎 같은 전사였다. 그가 새긴 판화에는 어둡고 암울한 고통의 역사가, 그 역사의 수레바퀴 아래 깔려 신음하는 민중의 삶이 오롯이 들어있다. 그의 시선은 늘 민중의 심장에 꽂혀 있었고,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몹시도 그리워했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작품에는 인간이 느끼는 고통과 연민, 아픔이 질펀하게 흐른다.

독일 판화가 케테 콜비츠

그녀를 기억하는 이유는 한가지다. 뼛골마저 사그라지던 굶주림 속에서도, 피빛 공포에 젖은 절망의 밥을 어금니로 씹어 삼키면서도 내 조상 제주 섬사람들이 침묵하지 않았던 역사, 케테 콜비츠가 조각칼로 새겼던 역사와 무엇이 다르고, 무엇이 틀린지 구별할 수 없기에 그녀를 기리며 그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이글을 쓴다.

케테 콜비츠는 1867년 독일 동프로이센 쾨니히스베르크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유년은 평범하지가 않았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부터 진보의 씨앗을 심은 꽃밭과 같았다. 외조부는 1848년 시민혁명 이후 민주헌법 제정에 참여했고, 기성 교회의 권위와 남을 배척하는 복음주의를 거부하고 합리주의와 윤리의식을 강조하는 자유 신앙운동을 펼쳤던 사람이었다. 아버지 역시 프로이센 정부의 민중억압과 부패상에 분노를 느껴 변호사 시험을 통과하고도 그 길을 가지 않고 자유교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헌신했던 미장노동자였다. 식구들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배운 콜비츠의 유년은 ‘가정’이라는 보금자리보다는 ‘사회’라는 공동체에 자연스럽게 눈이 맞추어졌다.

그녀의 남편 칼 콜비츠도 조합의사가 되어 주로 빈민들을 상대로 의료활동을 했던 사회주의자였다. 칼 콜비츠는 베를린 달동네에 자선 병원을 세워 그곳에서 가난한 이웃들을 보살폈다. 케테 콜비츠도 이곳 자선병원에서 일하며 고통 받는 독일민중들을 많이 만났다. 그녀가 예술작품 속에서도 민중의 삶에 포커스를 맞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격랑의 세월, 독일민중과 연대한 불꽃같은 예술

케테 콜비츠가 살았던 시대는 한마디로 역사의 격랑기였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은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전 영역에 걸쳐 일대 변혁의 횃불이 당겨지던 때였다. 혁명과 반혁명의 한가운데 유럽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1905년 러시아혁명, 1914∼1919년 1차 세계대전, 1917년 2월과 10월의 러시아 혁명, 1918∼1923년의 독일혁명, 1933년의 히틀러 집권과 1939∼1945년 2차 세계대전이 반세기에 걸쳐 큰 물줄기를 형성했다.

유럽의 어떤 국가보다도 더 잔혹하게 민중을 착취하고 억압했던 독일에서 그녀의 미술활동은 곧 반민중 전선에 대한 거침없는 항거를 의미했다. 당시에도 미술은 돈 있고 권력을 휘두르는 지배계급의 것이었다. 독점과 향유, 케테 콜비츠는 그 부르주아 귀족미술에 맞섰다. 고통 받는 민중들에게 예술은 ‘힘’이었고, 희망을 찾아 나서는 ‘무기’였다. 그러한 믿음은 그녀의 삶을 움직였다. 그녀의 작품들은 민중의 마음을 대변했고, 민중 곁으로 다가갔다. 독일민중과 그녀는 판화 하나로 소통했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들은 현대 독일의 가장 위대한 문학작품이다. 거기에는 민중의 시련과 고통이 깃들어 있다. 이 여인은 어머니같이 자애로운 팔로 민중을 끌어안고, 진심으로 그들과 고통을 함께했으며, 희생된 민중의 침묵에 형태를 부여했다.” (프랑스 소설가 로맹 롤랑)

케테 콜비츠는 작품을 통해 억압과 착취에 신음하는 민중과 ‘연대’했다. 인간에 대한 사랑과 연대했고, 고귀한 생명의 가치에 대해 연대했다. 지배와 피지배, 억압과 피억압의 관계에서 언제나 소외되고 학대받는 민중들이 간절히 희구하는 세상과 교신했다.

폭동 – 악덕 자본가의 집을 습격하는 장면이다. 세밀하게 묘사된 철창의 화려함과 직조공들의 초라한 모습이 뚜렷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다.

아틀리에를 점령한 풍경화나 정물화는 그녀 자신을 감동시키지 못했다. 그녀 자신도 “순수한 아틀리에 예술은 살아 있는 뿌리를 갖지 못했기 때문에 쓸모가 없으며, 사라져갈 뿐”이라고 말했다. 처음에 유화를 그리다가 나중에 가서는 에칭·석판화·목판화에 눈을 돌리게 된 이유 중의 하나다. <직조공의 봉기>, <농민전쟁>, <전쟁>, <프롤레타리아트>, <죽음> 등은 그녀가 인류에 남긴 위대한 역작이다.

콜비츠의 판화에는 억압과 착취에 맞서 저항하는 민중들, 가난에 억눌린 밑바닥 사람들, 전쟁이나 빈곤으로 상처 입은 슬픈 영혼들이 주인공들이다. 그의 테마는 결국 인간이었다. 지배하는 인간이 아니라 지배당하는 인간, 곧 우리 자신들. 일련의 작품에 투영된 모습은 한마디로 고통스럽다. 빛깔은 아주 어둡고 진하기만 하다. 한 시대의 여성으로서, 어머니로서, 한 인간으로서 자신이 살아온 삶을 성찰한 100여 점에 이르는 <자화상>에도 그 모습은 변함없다.

“이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살인, 거짓말, 부패, 왜곡 즉 모든 악마적인 것들에 이제는 질려버렸다…나는 예술가로서 이 모든 것을 감각하고, 감동하고, 밖으로 표출할 권리를 가질 뿐이다.” (케테 콜비츠)

그녀의 작품을 받치고 있는 강렬하고 애잔한 ‘고통의 미학’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그녀가 살았던 시대, 하루에 800명씩 굶어 죽는 1차 세계대전 이후의 독일 현실, 야만의 질서에 가두어진 노동자 등 민중의 삶 앞에 그녀는 침묵하지 않았다. 악몽 속에 방치된 인생들, 그 고통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았다. 하나같이 검고 참혹한 상처의 밑바닥을 드러내면서 구원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녀는 공장 노동자들의 눈에서 미래의 참세상을 꿈꿨다. 자본가가 만들어 놓은 야만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노동자가 설계하는 아름다운 세상 질서를 회복하고자 했다.

콜비츠의 판화는 긴박하다. 가난한 민중들의 삶에 그 어떤 여유도 보이지 않고, 당장에 퇴치해야 할 질병과 가난과 허위와 모순이 국가라는 도구에 의해 방치되고 있을 때 그녀는 부르주아 미술과의 어떠한 타협도 거부했다. 그녀의 판화는 민중과 더불어 들숨 날숨을 쉬었다.

진격 – 농민전쟁의 영웅 블랙애나를 모델로 하고 있는 작품. 그녀의 외침에 따라 앞으로 내닫는 농부들의 모습에서 아무도 멈추게 할 수 없는 속도감과 함성이 느껴진다.

처절한 분노의 감정, 살아있는 민중미술로 승화

<직조공의 봉기>(1893~1898)는 케테 콜비츠의 민중 중심의 사고를 가장 잘 드러낸 작품이다. 이 연작은 초기의 산업화 시대에 자본가와 수공업자들 간의 갈등을 기본축으로 삼고 있다. 1840년대 유럽을 강타한 산업혁명으로 등장한 직조 기계는 집에서 손으로 직물을 짜던 직조공들의 삶을 여지없이 무너뜨려 버렸다. 급기야 1844년 독일 변두리 슐레지엔에서 임금을 거의 굶어죽을 수준으로 삭감한 자본가에 대항하는 직조공들이 최초로 봉기를 일으켰다.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은 이 투쟁을 <직조공들>이란 이름으로 무대에 올렸다. 이 연극을 본 케테 콜비츠도 <빈곤>, <죽음>, <회의>, <직조공의 행진>, <폭동>, <결말>의 6부작으로 그날의 충격과 감동을 석판과 동판에다 새겼다.

그녀의 이 연작이 하우프트만의 극작품과 다른 것은 그녀가 직조공들의 삶과 투쟁에 전적으로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녀의 판화 작품에는 그 어디에도 억압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직조공들의 존재, 비참한 삶, 강렬한 몸짓을 새기는 것만으로도 계급투쟁을 정확히 묘사했고, 당시 자본가의 야만성과 직조공들의 처절한 분노를 단순 명료하게 사실주의 형식으로 담아냈다. 그녀는 짓밟힌 어둠의 시대에 캄캄한 창살을 뚫고 들어오는 한줄기 빛에 주목했다. 봉기는 처참하게 깨졌지만 직조공들에게 안겨주고 싶었던 것은 ‘절망 속에 피는 꽃, 희망’이었다.

노동자의 삶과 투쟁에 포커스를 맞춘 <직조공의 봉기>는 독일사회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1898년 베를린에서 처음 전시되었을 때 사람들은 큰 충격과 감동에 전율했다. 빌헬름 2세는 미술작품에 사회성 짙은 내용을 어떻게 담을 수 있느냐며 ‘시궁창 예술’이라 맹비난 했지만, 1899년 드레스덴 전시에서 그녀의 작품은 금상을 수상했고, 1900년 런던에서도 상을 받았다. 케테 콜비츠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후 그녀는 <농민전쟁>(1902~1908)을 주제로 연작을 그렸다. 독일농민전쟁은 1524년 악랄한 지주계급과 봉건영주에 맞서 최하층 무산자 계급인 농민들이 일으킨 혁명이었다. 성직자층과 귀족층 등 유산자 계급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었음에도 전쟁의 결과는 실패했고 참혹했다. 통째로 불타는 마을, 산더미처럼 쌓인 파괴의 잔해와 나무마다 매달린 농민의 시체, 그리고 대량학살…독일 역사에 새겨진 피의 기록이다.

케테 콜비츠는 르네상스 시대를 주름잡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 등 당대의 귀족화가들이 눈앞에 벌어지는 참상에 대해 침묵하거나 외면했던 농민전쟁을 20세기로 이끌어내 당당히 부활시켰다. <농민전쟁> 연작은 <밭가는 사람>, <능욕>, <낫을 가는 여인>, <무장>, <진격>, <전쟁터>, <포로들>의 7부작으로 완성한 대형 동판화로 농민의 삶과 투쟁에 비장감과 역동성이 넘치는 작품이다.

이 연작에서도 억압자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밭가는 농부의 숨결에서, 여인의 표정과 분노의 몸짓에서 농민대중을 짓밟는 자들의 실체를 느끼게 할 뿐이다. 가슴 뭉클한 안타까움, 서늘한 긴장감, 처절한 분노의 감정, 슬픔의 힘, 민중의 결연한 의지가 고스란히 침묵하는 동시대의 심장을 두드릴 뿐이다. 고도의 예술성이 담겨있는 <농민전쟁> 작품 하나하나에 진정한 리얼리즘이 살아있다. 케테 콜비츠도 이 연작에 대해 “자신이 가진 능력의 최상의 것을 투여했다”고 말했다.

포로들 – 결박당한 농민포로들은 마치 짐승들처럼 한곳에 내몰려 있고 자신들의 최후를 기다리며 절망하고 있다. 저마다 다른 자세로 자신의 운명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은 농민전쟁의 처절한 클라이맥스이자 끝을 상징한다. 서로 표정과 몸짓은 다르지만 그들은 한 덩어리다. 뗄래야 뗄 수 없는 슬픈 공동운명체다. 그림 오른쪽 무릎이 꺾인 채 두 손이 묶여 있는 어린 아이는 이 전쟁의 참혹함을 더해 준다.

전쟁과 죽음, 그곳에는 ‘인간’이 있었다

케테 콜비츠의 작품세계를 또 하나 지배했던 것은 ‘죽음’이었다. 그녀의 일상조차 죽음의 그림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녀의 삶에는 항상 죽음의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그녀는 아들 페터를 잃었다. 1942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는 큰손자 페터마저 죽음의 늪에 내려놓아야 했다. 모두 참전했다가 전사했다.

전쟁과 죽음, 그녀에게는 풀기 어려운 영원한 숙제였다. 그녀의 개인 불행이 아니라 동시대 어머니들이 겪었던 비극이었다. 많은 젊은이들이 독일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야욕에 제물로 끌려가 희생됐다. 전쟁은 전 유럽의 젊은이들의 꽃다운 목숨을 의미도 없이 송두리째 빼앗아갔다. 아들을 잃은 슬픔 속에 침잠하던 케테 콜비츠는 마침내 자신의 불행을 민중의 고통으로 승화시켰다. 유럽사회의 한 세대가 전멸하는 죽음의 역사가 거침없이 진행되는 동안 그녀는 반전을 주제로 전쟁에 관한 수많은 작품을 발표했다. ‘실패한 아틀리에 미술’을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시대의 한복판으로 이끌어 냈다.

<전쟁>(1922~1923) 연작은 동시대인들 모두가 겪게 된 전쟁의 참상을 아프게 전하는 작품이다. 전쟁으로 죽게 된 사람과 그와 연관된 부모와 부인, 자식, 어머니의 운명을 목판화에 또렷이 새겼다. 이 연작은 <희생>, <지원병들>, <부모>, <어머니들>, <과부들1>, <과부들2>, <민중> 등 7개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희생>은 1931년 중국에 소개되어 중국 신목판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이후 케테 콜비츠의 판화 작품들은 중국 인민들의 삶을 드러내는 사회주의 리얼리즘 미학이 뿌리를 내릴 때까지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죽어 가는 아이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어찌할 수 없는 슬픔에 고개 숙인 <짓밟힌 사람들>(1900), 떠나려는 아이의 영혼을 마지막까지 붙잡으려는 듯 있는 힘을 다해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1903)에서 전쟁의 세기에 세계의 수많은 어머니와 아들들이 공통으로 겪게 될 운명을 예감했던 그녀. 마찬가지로 그 운명의 주인이 되어 자식을 잃은 슬픔으로 마침내 세상의 어머니가 된 콜비츠. 대학살의 현장에서 그녀가 새기는 석판화는 소름이 끼칠 정도다. 선명한 고통의 현장에서 아픔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슬픔을 깔고 거침없이 흐르는 반전평화의 메시지는 한 시대의 고난을 증거한다.

전후 독일사회의 아이들이 오직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밥그릇 하나에 모든 희망을 걸고 있는 <독일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다!>(1924)와 떼를 쓰며 <빵을!>(1924) 달라고 매달리는 어린 생명들에게서 콜비츠의 호소는 애절하다 못해 시퍼렇게 살아 있다. 제1차 세계대전 반전 포스터 작품 <전쟁은 이제 그만!>(1924)과 <씨앗들이 짓이겨져서는 안된다>(1942)고 선언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단호하다.

독일 어린이들이 굶주리고 있다! – 콜비츠는 이 작품에서 굶주림에 허덕이는 생명의 존엄성과 인간 존재의 존귀함을 애절한 몸짓으로 고발하고 있다.(왼쪽) 빵을! – 굶주림으로 허리가 휘어진 채 등을 돌리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과 팔에 매달린 어린 생명들의 표정에서 시대의 절망을 읽을 수 있다.(오른쪽)

전쟁은 아이들에게서 순식간에 부모와 집과 학교를 빼앗아갔고, 대신 절망과 공포와 기아와 죽음을 남겼다. 질풍 같은 노도와 폐허 위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그 생생한 공포를 털어낼 겨를도 없이 거리로 나온 아이들. 살기 위해 빈 밥그릇을 높이 치켜드는 저 퀭한 아이들의 눈동자를 보라. 앙상한 팔뚝과 겁에 질려 동공이 커진 눈, 추위와 공포에 바들바들 떠는 저 어린 생명들의 밥그릇을 보라. 케테 콜비츠는 잔혹한 야만의 역사를 보았다. 희망이 사라져버린 인간 세상이 허울 좋은 전쟁이라는 구실 속에 파괴되는 학살의 현장을 두 눈으로 지켜보았다.

이 무렵 콜비츠는 노동자계급의 삶을 솔직하게 작품으로 표현했다. 하지만 민중의 비참한 삶을 직접적으로 그리던 게르하르트 하우프트만, 아르노 홀츠 등의 문학작품과는 달리 강하고 날카로운 목판예술로 프롤레타리아의 삶을 형상화했다. 그 작품이 <프롤레타리아트>(1925)이다. <실업>, <기아>, <자식의 죽음> 등 3부작으로 구성된 이 연작에서 그녀는 극한에 이른 노동자계급의 빈곤상황을 섬뜩할 정도로 간결하게 묘사하고 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이 세상에 남긴 연작은 <죽음>(1934~1935)이다. 죽음에 대한 그의 천착은 집요하다. 반역의 역사를 헤쳐 온 그녀가 인류에 남기고 싶은 ‘화두’일 수 있겠다. 이 연작은 <소녀를 무릎에 앉힌 죽음>, <죽음이 덤벼들다>, <부랑자의 죽음>, <친구로서의 죽음>, <죽음을 영접하는 여인>, <죽음의 부름> 등 여덟개의 석판화로 구성되어 있다.

“나의 시대는 끝났다”…그러나 끝나지 않은 야만의 역사

그녀에게 색채는 무엇인가. 봄날 아지랑이 같이 심미에 갇힌 유희, 아니면 관념이지 않았겠는가. 그가 자신의 심장에 칠했던 색은 오직 흑색, 회색, 백색 정도였다. 그 세가지 색으로 인간세상의 아픔과 슬픔과 어둠을 오롯이 드러냈다.

나치 파시즘 정권이 지배하면서 케테 콜비츠는 온갖 압박을 받고 작품을 발표할 기회마저 빼앗겼다. 중국의 노신은 “이 위대한 여류예술가는 오늘날 침묵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작품은 점점 극동으로까지 퍼지고 있다. 예술의 언어가 이해되지 않는 곳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케테 콜비츠 이후 세계 민중미술은 그녀가 걸어간 길을 겸허히 따라 걸었다.

말년에 케테 콜비츠는 몸도 마음도 지쳐 있었다. 나치 치하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악몽이었다. 아무런 이유없이 죽어간 사람들의 분노와 슬픔, 저항과 절망, 그 고통스러운 현실 앞에 영혼을 내맡겼던 그녀, 케테 콜비츠는 1945년 4월 22일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8일 뒤 히틀러도 죽었다. 다시 일주일 뒤 나치 독일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너희들 그리고 너희 자녀들과 작별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니 몹시 우울하구나. 그러나 죽음에 대한 갈망도 꺼지지 않고 있다. 그 고난에도 불구하고 내게 줄곧 행운을 가져다주었던 내 인생에 성호를 긋는다. 나는 내 인생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으며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 이제는 내가 떠날 수 있게 놓아주렴. 내 시대는 이제 다 지났다.” (1944년 7월, 케테 콜비츠)

케테 콜비츠는 ‘프롤레타리아 미술의 선구자’, ‘미술사의 로자 룩셈부르크’란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찬사도 그녀의 삶과 예술을 모두 충족시키지는 못한다. 짓밟힌 영혼의 벗, 그녀의 인생은 찬란한 슬픔의 봄과 같다. 거룩하고 아름답다.

그녀는 가고 없지만 이 세상 억압과 착취, 전쟁과 죽음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무엇 하나 ‘종결’을 선언하지 못하고 있다. 야만의 역사는 비극을 물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오늘,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망각의 세월인가, 아니면 달콤한 자본의 유혹인가.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20919.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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