댓글 남기기

귀기울이라, 모든 고통은 위대할지니

등록 : 2013.03.15 20:10수정 : 2013.03.15 21:44

 

정여울의 내 마음속의 도서관

통증연대기
멜러니 선스트럼 지음, 노승영 옮김
에이도스(2011)·1만8000원

여기저기서 힐링 열풍이 거세다. 이 요란한 힐링 열풍에는 뭔가 불편한 광기가 스며 있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뭘까. 아픔에 대한 성급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닐까. 아픈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듯한 조바심. 아픔은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 믿는 조급증. 아픔의 의미를 곱씹어보기도 전에 아픔을 무차별적으로 퇴치하려는 성급한 통제의 욕망이 불편하다. 통증은 공포를 자아내지만, 분명 우리에게 어떤 절박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 통증의 메시지를 우선 가만히 들어보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

멜러니 선스트럼의 <통증연대기>는 참을 수 없는 고통에서 ‘몸의 이야기’를 들어보라 조언한다. 고통의 울타리 바깥에서 고통받는 이들을 우아하게 위로하는 책이 아니다. 그녀 자신이 심각한 류머티즘 질환으로 오랫동안 고통받아온 통증전문가다. 몸이 우리가 바라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몸과 싸우지 말고, 정신력으로 몸의 반란을 제압하려는 욕심에 붙들리지 말고, 힘겹지만 천천히 몸의 뜻을 따르라는 것. 그녀는 각종 진통제로 고통을 진압하려 하지 않고, 맹렬하게 통증일기를 쓰고, 통증에 대한 모든 학문의 조언을 받으며, 스스로의 고통을 받아들인다. 그녀는 통증의 역사, 마음의 은유로서의 통증, 통증이 삶을 바꾸고 삶이 통증을 바꾸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때로는 드라마틱한 서사로 때로는 서정적인 울림으로 그려낸다.

의학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고통에 대처하는 면역력을 떨어뜨린 측면도 있다. 견딤의 가치는 퇴색하고, 효과 빠른 진통제의 중독성은 커진다. 작은 고통에도 쉽게 건강염려증에 시달리고, 과잉진료의 폐해도 급증한다. 쉽고 빠른 진통제만 찾다가 놓치는 건 뭘까. 바로 고뇌하고 진통하는 능력이다. 현대인은 아픔에서 도망치느라 아픔이 가르쳐주는 진실을 외면한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는 고통의 의미를 꿰뚫어보는 자의 명대사가 있다. 포르피리가 사람을 둘이나 죽인 라스콜리니코프에게 자수를 권하자,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를 시험한다. 만약 자수하지 않고 도망친다면 어쩔 거냐고. 포르피리는 말한다. 당신은 결코 도망치지 않는다고. “왜냐하면 괴로움이란 위대한 것이니까요.” “괴로움에는 사상이 있으니까요.”

고통을 묘사하는 모든 문학작품은 속삭인다. 고통으로부터 도망치지 말고, 고통 속에서 의미를 찾으라고. 고통을 마음 깊이 받아들임으로써 무의식이 의식에게 보내는 무언의 메시지를 읽어내라고.

고통은 우리 무의식의 트라우마와 콤플렉스를 응축한 그림자(shadow)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든다. 우리는 저마다 무의식 깊은 곳에 숨기고 싶은 내면의 그림자를 갖고 있는데, 가끔 아주 결정적인 순간에 바로 그 그림자가 우리를 구원한다. 나는 1차 세계대전 당시 아들을 잃은 고통을 조각상으로 표현한 케테 콜비츠의 작품에서, 시공간을 뛰어넘는 고통의 강렬한 메시지를 듣는다. 그녀가 견딘 끔찍한 아픔을 고스란히 담아낸 조각들을 통해, 그녀의 그림자가 나의 그림자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아름다운 착시를 경험한다. 때로 고통은 존재를 파괴하는 듯하지만 존재의 진정한 내면을 되찾게 해주는 힘이 된다. 내게도 글쓰기는 고통이다. 하지만 고통스런 희열이다. 끝없는 불면의 밤과 각종 직업병은 고통이지만, 글을 통해 오래전에 끊어진 옛 인연이 되살아나고, 글을 통해 예상밖의 새 친구들을 만나는 것은 눈부신 희열이다. 우리는 그렇게 고통을 통해,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느리지만 강인하게 진화한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Advertisements

답글 남기기

아래 항목을 채우거나 오른쪽 아이콘 중 하나를 클릭하여 로그 인 하세요:

WordPress.com 로고

WordPress.com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Twitter 사진

Twitter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Facebook 사진

Facebook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Google+ photo

Google+의 계정을 사용하여 댓글을 남깁니다. 로그아웃 / 변경 )

%s에 연결하는 중

%d 블로거가 이것을 좋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