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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Bauhaus)’

독일어로 ‘바우(Bau)’는 ‘건축’을 뜻하고 ‘하우스(Haus)’는 ‘집’을 뜻한다. 이 두 단어만 봐도 오늘 다루는 ‘바우하우스(Bauhaus)’에 대한 대강의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코너는 ‘오늘의 미술’이 아닌가? 건축 주제를 왜 미술에서? 라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바우하우스를 설명하고 이해하는 키포인트가 될 듯하다.

 

 

기본적인 정보부터 살펴보면,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독일 바이마르에서 설립되었으며 1933년 나치에 의해 강제 폐교되기까지 약 14년간 존속된 새로운 형태의 예술교육기관이었다. 그렇다. 이름부터 특이한 바우하우스는 분명 기존의 ‘~학교’와는 다른 교육 이념과 커리큘럼을 갖고 출발한 그야말로 ‘새로운’ 교육 시스템이었다. 여기엔 바우하우스 구상에서부터 교육 프로그램과 교수진 선정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한 초대 학장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역할이 지대했다.

베를린 출신의 그로피우스는 당시 전도 유망한 젊은 건축가였다. 그런 그가 대체 어떤 경위로 이러한 교육 시스템을 기획하고 도맡게 되었을까? 먼저 이 시기 독일의 상황을 살펴보자. 19세기 말 독일은 선진산업국가 영국을 뒤따르고자 부단히 노력했다. 이러한 국가적인 정책과 관심에 힘입어 1907년 가을, 독일 우량 제품 진흥의 중심기관이라 할 수 있는 ‘독일공작연맹(Deutsche Werkbund)’이 결성되었다. 그로피우스도 멤버로 활약한 이 연맹의 목적은 미술, 공업, 수공예가 협력해 더욱 더 향상된 공업제품을 생산해냄으로써 다른 국가들과의 산업경쟁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1919년의 발터 그로피우스.

 

 

과거의 건축정신을 되살리려는 노력


그로피우스가 볼 때 건축의 공업화 역시 시급한 문제였다. 더욱이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패전국가 독일 내 주택단지 건설에 대한 높은 기대와 요청은 이에 확신을 더해주었을 것이다. 그는 양질(良質)의 합리적이고 경쟁력 있는 주택이 공급되기 위해서는 예술과 기술이 결합된 표준규격의 건축자재가 대량으로 생산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1918년 11월에 창립된 ‘예술노동평의회(Arbeitsrat für Kunst)’ 활동을 거쳐 마침내 1919년 4월 바이마르에 세워진 ‘국립바우하우스(Staatliche Bauhaus)’의 학장에 임명되면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비록 그 구상이 본격적으로 실현된 것은 바우하우스에 정규 건축학과가 생긴 1927년에 이르러서였지만 말이다.

 

  • 1 발터 그로피우스 [파구스 공장] 1911년
    구두 틀 제조공장이었던 파구스는 그로피우스의 첫 번째 작품이다. 건물의 모서리를 받침대 없이 강철과 유리로만 감싸 가볍고 투명한 느낌을 준다. <출처:Mike Reiss at de.wikipedia>
  • 2 리오넬 파이닝거, 대성당, 1919년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의 표지 목판화

 

 

바우하우스 창립 당시 학생들을 모집하기 위해 배포된 팜플렛에는 그로피우스가 작성한 선언문과 교육 프로그램이 기재되어 있었다. 선언문의 주요 골자는 ‘미래의 새로운 건축을 위해 조각, 회화와 같은 순수미술과 공예와 같은 응용미술이 통합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특히 살롱 미술로 전락한 당대의 미술은 오로지 공예가들과의 적극적인 협력을 통해서만 과거의 건축정신을 되살려낼 수 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 주목할만하다. 이는 바우하우스가 중세 고딕 성당 건축과 같은 작업방식, 즉 바우휘테(Bauhütte)를 참조하고 있으며, 팜플렛 표지로 쓰인 리오넬 파이닝거(Lyonel Feininger)의 목판화 이미지는 바로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이념을 상징함을 의미했다. 참고로 파이닝거는 바우하우스에서 판화인쇄를 가르치기 위해 그로피우스로부터 제일 먼저 초빙된 화가였다.

약 150명의 학생들과 함께 5월 말에 시작된 수업은 분명 새로운 방식이었다. 먼저 예술가와 공예가뿐만 아니라 학생들과의 위계나 차별 역시 불식시킨다는 의미에서 교수대신 마이스터(Meister)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개교 이래 1923년까지 학생들은 스위스 화가 요하네스 이텐(Johannes Itten)으로부터 형태와 색채에 대한 기본 원리를 배우는 6개월 간의 예비교육을 이수하고 도제(apprentice)가 되어 다음 단계인 3년간의 공예교육과 형태교육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공예교육은 조각, 목공, 금속, 도자,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텍스타일 실기를 가르치는 각 분야의 공예마이스터(Werkmeister)가 맡았고, 형태교육은 자연과 재료에 대해 연구하고 공간, 색채, 구도 및 표현을 지도하는 형태마이스터(Formmeister)가 이끌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울 클레(Paul Klee)는 1920년에, 바실리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는 1922년 초에 형태마이스터로 임용되었다. 선과 색의 구성에 관한 기본적인 문제들을 다루는 이 두 화가의 태도에는 공통점이 많아서 교육 내용 역시 매우 비슷했다고 한다. 한편 공예마이스터의 경우는 텍스타일 공예교육을 마치고 1922년 직인 시험을 통과한 군타 슈톨츨(Gunta Stolzl)이 훗날 이 공방의 뛰어난 여성 지도자가 되면서 유명해졌다.

 

클레 [대장장이 KN] 1922년
유화, 32.8cmx35.6cm, 조르주 퐁피두센터
© Paul Klee / BILD-KUNST, Bonn – SACK, Seoul, 2010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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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딘스키 [작은 세계들 IV] 화집 ‘작은 세계들’ 중, 1922년
석판화, 26.6cmx25.6cm, 뉴욕 현대미술관
© Photo RMN, Paris – GNC media, Seoul
프랑스국립박물관연합(RNM) 지엔씨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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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


1919년 선언문을 통해 ‘건축가, 조각가, 화가들은 모두 공예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외치며 개교한 바우하우스가 결정적인 변화의 계기를 맞게 된 것은 기초교육을 담당했던 이텐이 사임하고 난 1923년 이후부터였다. 그 자리는 마이스터로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헝가리 미술가 라슬로 모호이너지(László Moholy-Nagy)에게 돌아갔다. 정부의 지원금을 받는 기관의 학장으로서, 또한 산학 협동과 재정 확보에 늘 관심을 갖고 있었던 그로피우스와 종교적 명상과 개인의 영성을 중시하며 무엇보다 기계를 혐오하는 이텐은 잘 맞지 않았다. 반면 모호이너지는 기계를 ‘이 시대의 정신’으로 받아들인 인물이었다.

그로피우스는 모호이너지의 지원에 힘입어 ‘예술과 기술의 새로운 통합’이라는 슬로건 아래 바우하우스의 교육 방향을 중세주의와 낭만주의적 공예 중심에서 보다 확실하게 산업디자인 중심으로 틀었다. 그리고 1923년 8월 15일부터 19일까지 개최된 바우하우스의 첫 전시는 이러한 전환을 입증하는 자리였다. 대대적인 홍보와 함께 바우하우스 공방에서 생산된 다양한 제품과 가구, 도자기, 그래픽 디자인, 순수미술 작품들, 연극, 무용 공연과 실험주택 등이 <바우하우스 주간(Bauhaus woche)>으로 명명된 이 기간 동안 소개되었다. 그러나 15,000명에 이르는 관람자수와 꽤 많은 제품 주문량에도 불구하고 전시회가 성공적이었다고 볼 수는 없었다. 세련되고 단순한 형태의 제품들이었지만 대량생산을 위한 기본적인 체계가 미흡한 상태에서는 여전히 수공예로 제작될 수 밖에 없었고, 따라서 가격 역시 높았다.

 

그로피우스가 1926년에 완공한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 <출처:Mewes in de-Wikipedia>

전시회를 통해 정부지원의 기회를 확대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어 자금 확보와 재정적 자립의 발판을 마련하고자 한 바우하우스 측의 의도는 좌절되었다. 게다가 국가사회당(Nazi)이 바이마르를 장악한 후 학교 지원금 대폭 삭감과 여러 가지 정치적 탄압으로 인해 바우하우스는 해산의 기로에 놓였다.

그러던 차에 북부의 산업도시 데사우시(市)에서 바우하우스를 인수하겠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시 당국은 주거공간 문제 해결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1926년 그로피우스는 유리 정면과 철골 구조로 이루어진 획기적이고 아름다운(그러나 냉난방은 비효율적인!) 새 바우하우스 건물을 1년 만에 완공해 선보였다. 건축에서부터 실내, 가구 및 시설물 디자인이 모두 산업적 기능주의에 입각한 바우하우스 교사와 학생들의 솜씨임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대학’의 지위를 얻은 바우하우스의 마이스터들은 교수로 불려졌고 졸업생들은 석사학위를 인정받았다. 무엇보다 1927년 건축과가 개설되어 교수 주택과 퇴르텐 주택단지, 그리고 아케이드 건물 등의 주요 건축 임무를 도맡았다. 그러나 여전히 산업과의 교류는 활발하지 못했다. 그로피우스는 이에 책임을 지고 1928년 마침내 학장에서 물러났고, 스위스 건축가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가 새로 임명되었다. 문제는 바우하우스의 생산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춘 마르크스주의자 마이어와 바우하우스 미학의 가치를 중시하는 클레와 칸딘스키, 오스카 슐레머(Oskar Schlemmer)와 같은 예술가들 사이의 불화였다.

이에 바우하우스의 좌경화 역시 부담스러웠던 시 당국은 1930년 여름 마이어를 해임하고 독일 건축가 루트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를 초빙했다. 미스는 바우하우스를 철저하게 건축예술 중심으로 운영했다. 상품 제작 역시 오직 건축과 연결되고 공업적 생산이 가능한 디자인으로 제한했다. 순수예술 연구 강화를 기대했던 예술가들 가운데 클레 같은 이는 바우하우스를 떠나는 쪽을 택했고, 칸딘스키는 순수미술 강의가 폐지되지 않도록 새 학장을 상대로 항의와 설득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분란도 잠시. 1932년 9월 데사우 시의원 가운데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나치주의자들에 의해 바우하우스는 폐쇄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다행히 계약상의 의무 이행에 따라 교수들의 봉급과 남은 기간 교육 자재 공급은 보장되었다. 이에 2년 차 학장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바우하우스를 자신이 인수해 베를린으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옛 전화기 공장 건물을 빌어 사립 연구소로서 수업을 재개했으나 나치 정권의 탄압과 게슈타포의 감시는 극에 달했다. 1년이 채 못된 1933년 7월 20일, 칸딘스키를 비롯한 교수진과 미스는 마침내 바우하우스 폐교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바우하우스의 인재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자국으로 돌아가거나 정치적 박해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기도 했다. 그로피우스는 하버드 대학에서 교편을 잡았고, 모호이너지는 시카고 뉴 바우하우스를 설립했다.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일리노이 공과 대학 건축학과에서 활동하며 바우하우스 교수진과 학생들을 불러모았다. 독일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후 바우하우스를 계승한 ‘울름 조형대학(Hochschule fuer Gestaltung Ulm)’이 1955년 막스 빌(Max Bill)에 의해 세워졌다. 이렇게 바우하우스에서 이어진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도 바우하우스의 흔적은 쉽게 발견된다. 대부분의 미술 대학 커리큘럼이 바로 90년 전 바우하우스 프로그램으로부터 발전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바우하우스에서 생산한 전등, 벽지, 가구와 같은 산업제품들, 그리고 타이포그래피 등은 그 단순하고 세련된 형태와 구성으로 디자인의 고전이 되었다. ‘생활 속의 디자인’이라는 문구가 별로 새로울 것 없는 우리들에게 바우하우스의 고군분투가 새삼 의미 있게 다가온다.

 

관련링크 : 통합검색 결과 보기 파울 클레 미술검색 보기

 

 

 

이민수 / 미술칼럼니스트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졸업,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인간, 사회 그리고 미술의 상호 관계와 이 세 가지가 조우하는 특정 순간을 탐구하는 데에서 미술사학의 무한한 매력을 느낀다. 현재 문화센터와 대학교에서 미술사를 강의하고 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51&contents_id=6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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