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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메시스(Mimesis).디에게시스(diegesis)

디에게시스 [diegesis]  

요약

어떤 스토리와 그 스토리에 관련된 실제의 말하기를 구분하기 위해 서사이론에서 사용하는 용어.

본문

 

서술된 사건들(story)이 일어난 허구의 세계를 가리키기 위해 서사이론에서 쓰는 말이다. 즉, 어떤 스토리와 그 스토리에 관련된 실제의 말하기를 구분하기 위한 용법에 사용된다. 디에게시스에 관한 다소 애매하고 조금은 고루한 또 하나의 용법은, 이 용어를 미메시스(mimesis:모방), 즉 작품 외부 현실의 복제와 대비시키는 것이다. 이때의 디에게시스는 사물이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미메시스는 그 사물이나 사건을 가능하면 완전하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디에게시스와 미메시스의 차이를 구분해주는 좋은 예를 연극공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연극에서 보여지는 어떤 특수한 장면의 연기를 미메시스라 한다면, 무대 밖에서 일어났거나 그 연극에 재현된 행동(연기)에 앞서서 일어난 다른 행동(이 행동은 관객이 볼 수 없으며 다만 이야기로 알려주는 것을 듣게 된다)에 관하여 등장인물이 이야기하는 것을 디에게시스라고 하여 구분한다.

디에게시스는 이야기를 형식적·체계적 구조로서 취급하며, 이야기가 기능하는 방식을 연구하고 이야기를 지배하는 코드(code)와 전의(轉義)를 찾아내는 것을 주요 과제로 삼는 서사학에서 특히 중시되는 개념이다. 한 편의 이야기(narrative)에 나타나는 디에게시스적 층위는 스토리의 주요 사건들이 일어난 작품 내의 허구적 세계를 가리킨다. 그런데 작품 내의 사건들에 관한 말하기는 그 사건들이 일어난 후에, 또는 또 하나의, 불문에 부쳐진, 허구적 세계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스토리에 관한 말하기는 보통 엑스트라디에게시스적으로 간주된다.

 

영국 해양문학의 대표적 작가로 알려진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의 장편소설 《로드 짐 Lord Jim》은 텍스트 묻어놓기(embeded text)의 기법으로 이루어졌다. 이 작품에서는 스토리텔링 그 자체가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인물들은 서술자로서 등장한다. 이러한 경우, 서술자들이 말하는 스토리는 하이포디에게시스적 또는 메타디에게시스적이라고 불러 이 스토리와 소설 속의 일차적 이야기 사이와의 관계를 표시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미메시스(Mimesis).디에게시스(diegesis)

미학 개론서에 보면 이걸 ‘모방’이라고 번역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음악을 숫자의 미메시스, 즉 모방이라 칭하였고
플라톤은   이데아에 대한 열화된 모방을 지칭함을 일컬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모방 자체가 자유로운 표현으로 연결될 수 있음을 인정하였다.
스콜라 학파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인정한 것 같다.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
빙켈만은 고전주의를 주장하며 미술의 임무는 바로 고대 미술의 모방이라고 하였다.
낭만주의 시대가 되면서
서양문명은 비로소 모방의 주박에서 벗어나 비정형적인 창작과 영감을 인정한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미메시스는 중요한 인간의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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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에게시스는 사물이나 사건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의미하고,

미메시스는 그 사물이나 사건을 가능하면 완전하게 재현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디에게시스와 미메시스의 차이를 구분해주는 좋은 예를 연극공연에서 찾아볼 수 있다.

 

<미메시스>

연극에서 보여지는 어떤 특수한 장면의 연기를 미메시스라 한다면,

 

<디에게시스>

무대 밖에서 일어났거나 그 연극에 재현된 행동(연기)에 앞서서 일어난 다른 행동(이 행동은 관객이 볼 수 없으며 다만 이야기로 알려주는 것을 듣게 된다)에 관하여 등장인물이 이야기하는 것을 디에게시스라고 하여 구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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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드웰은 자신의 이론을 정립하기전에 크게 3가지 과정을 거친다.
우선 기존의 영화이론의 한계를 2가지 부분으로 나누어 비판한다.
그중 하나는 미메미스이론에 입각한 모방이론이고(showing)
다른 하나는 언어학,기호학적인 모델에 입각한 디에게시스 이론이다(telling)
모방이론에서는 이야기를 그림을 그려보여주듯이 전달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고
그 모방양식으로서 크게 공연과 회화, 소설이 어떻게 각각의 매체에 맞는 보여주기를 시도했던가를 밝힌다.
그러한 역사적 개괄을 지나 영화이론에서 이를 대표하는 이론을 푸도프킨의 ‘보이지 않는 카메라’ 개념과 연결하는데,
카메라는 이상적인 관찰자의 시점을 대변하면서 극화되는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푸도프킨의 관점은
오즈의 카메라 위치나 풀샷에서 섬세하게 고려되는 미장센, 동선, 배우 위치조정등이라는 몇가지 영화기술적인 부분에
대한 누락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받고 있다.
그리고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쥬로 넘어가는데, 보드웰은 에이젠슈타인이 감정과 정서를 고양시켜 의미를 산출하게 하고자했다는
점에서 매우 내레이션적인 시도를 진행했음을 인정하고 그의 이러한 태도들이 현실적인 공간에서만 이뤄지고
체계적으로 이론화되지 않았기때문에 아쉽지만, 자신의 이론의 방향과 유사한 지점이 있음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보드웰은 디에게시스 이론으로 넘어가는데, 이 부분은 러시아 형식주의에서 자극되고 언어학과 기호학에 영향을 받은
문학비평의 경향과 병치되어 진행된 영화이론들이 결국 최소한의 언어분석의 형태인 단위에 대한 모호한 지점으로 인해
결국 그 시도가 실패했다는 점을 이야기한다. 크게 콜린 맥케이브와 크리스티앙 메츠를 비판하는데
전자는 메타언어와 대상언어에 대한 구분이 매우 도식적이고 결국 그러한 논의를 따르게 되었을때 또다시
모방이론의 ‘보이지 않는 카메라’의 설정으로 연결되기에 한계를 지니며
후자는 영화가 언표가 아닌 언표행위로서의 가능성을 시제, 태, 시점등의 논의로 확장시키지만 결국 각 이론가들마다
분석의 담론들의 불일치로 인해 한계를 보인다고 분석한다.
결국 보드웰은 기존의 이론의 한계점을 지적한뒤 구성주의 인지학을 통해 관객이 어떻게 영화를 받아들이는가를 살펴본다.
이 부분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자 보드웰의 이론을 상징적으로 다시 보여주는 지점인데
이유인즉 결국 보드웰은 영화를 나레이션의 매체로 사유했을때 그 나레이션의 전략이 존재하기위해서는
수용자가 그 전략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 연구가 병행되어야만 성립될수 있는 것이기때문이다.
이 지점은 이후 보드웰이 자신의 이론의 핵심을 ‘관객이 슈젯을 확인하면서 끊임없이 파불라를 구성하려는 노력’이라고
규정짓는 부분에서 명확해진다. 시간예술인 영화에서 관객은 매시간 등장하는 단서들을 통해 이야기를 구성하고자하고
그러한 구성의 노력에서 언표행위적인 순간들과 내러티브전략적인 측면들을
스타일과 영화기술에 의존해서 해석하고 판단하려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의가 진행되기위해서는 고로 관객은 어떻게 지각하고 인지를 구성하는가를 살펴봐야하며
이에 기여하는 부분이 구성주의 인지학에 대한 보드웰의 소고이다.
이제 보드웰은 3가지 과정을 걸쳐 자신의 이론을 정립한다. 그리고 그 전체적인 틀은 앞서 이야기한 슈젯과 파불라의 논의로
이어진다. 이렇듯 전반적인 전개를 개진한뒤 그는 자신의 장기인 구체적인 영화분석을 통해 하나둘씩 그의 이론을
설명하려할것이다. 그 부분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이제 그는 자신의 이론을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 흥미진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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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나레이션
2장 내레이션의 디에게시스 이론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은 문학이 무엇보다 언어의 문제임을 이야기. 바흐찐은 문학텍스트를 가리켜 담론들이 역사적으로 다양하게 혼합된 것이라고 주장. 소설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다른 질서가 만들어내는 다성성이고 불협화음적인 것이다.

디에게시스 이론은 구조주의의 발전과 관계.
2가지 시기 구분:
1. 형식주의의 문학 및 영화 연구. 언어와 영화의 유사성을 처음으로 집중. 뜨이냐노프는 행을 쇼트로, 에이헨바움은 영화는 언어적 기반을 가지며, 내적언어와 관련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들은 네러티브에 대한 엄격한 분석을 행하지는 않았다.
2. 롤랑바르트의 문화현상에 대한 기호학적 연구. <내러티브의 구조적 분석> ‘외연과 함축의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의미작용연구’에서 ‘언어상의 주체성 문제에 집중하는 언표행위 연구’로 구조주의의 관심이 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이 장에서는 그러므로 프랑스 구조주의가 출현한 이후의, 콜린 맥케이브의 ‘고전적 사실주의 텍스트’이론을 검토할 것이다.

메타언어로서의 영화나레이션(맥케이브 비판)

메타언어로 대상언어의 틀을 형성한다는 점에서 그는 지배적 내러티브영화가 19세기 사실주의 소설과 유사하다고 간주. 소설적인 메타언어는 담론의 위계를 만들고, 진실을 말하며, 투명하다는 3가지 특징을 지닌다. 고전적 내러티브 영화에서 인물들은 말하지만 그들의 담론은 늘 카메라를 통해 형성되기에 카메라는 소설가의 메타언어이다. 그러므로 주류영화의 나레이션은 오해될 수 있는 인물의 대사와 진실을 보장하는 시각담론간의 대립에 의존한다.
맥케이브에게는 대상언어는 직접적인 담론(따옴표안의 말)이고 메타언어는 인용부호속에 들어가는 않은 나머지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너무 단순하다(Ex>’그녀는 혼자인 것이 놀랍다고 생각했다’, ‘혼자라니, 얼마나 놀라운가!’를 구분할수없다)
맥케이브의 소설과 언어에 대한 정형화를 예시하는 것은 바흐찐과의 구분이다. 맥케이브가 19세기 소설을 지배적 담론아래 고정된 독백이라 생각한 반면 바흐찐은 소설을 대화나 불협화음의 전통이라 생각했다. 바흐찐은 내레이터의 개입은 현실에 대한 미리 정의된 다양한 개념들에 대해 공격이라고 생각.
맥케이브가 소설의 역사를 단순화했다면, 영화적 내레이션의 범위는 훨씬 더 축소: 카메라를 메타언어로 본것은 관찰자 모델의 선례로 돌아간 것이다(카메라의 특권화) 그러나 보드웰은 카메라만이 아니라 다양한 미장센, 영화적 요소들이 내레이션적으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언표행위로서의 영화내레이션(방브니스트 비판)

언표와 언표향위의 구분. 언표는 발화, 텍스트의 연장이며 정합성의 원리로 결합되어 전체를 구성하는 단어,구절, 문장이다.(산문체 픽션과 역사적 글쓰기) 반면 언표행위는 화자와 청자, 공유된 세계에 대한 어떤 지시를 포함한다.(“엘리자, 내 슬리퍼를 가져와라”말의 정황을 분명하게 제시)
방브니스트: 언표행위를 담론. 언표행위의 표지를 생략한 것은 이야기(화자의 개입없이 제시).
영화에 방브니스트의 논의를 적용하려던 사례. 언표행위와 관련해서 영화는 어떻게 규정될까?
크리스티앙 메츠의 몇가지 답: 영화가 언표행위적 차원을 갖는 것은 영화제작자의 의도와 일반 대중에게 행사하는 영향력때문이다. 19세기 소설처럼 영화는 과거시제와 비인칭법으로 행위를 제시한다(나는 그것을 보지만 그것은 보고 있는 나를 보지 않는다) 영화는 담론적이지만 은밀한 방식으로 그러하고, 오히려 영화는 이야기로 가장한다는 것이다. 이는 영화내레이션을 언어학에 기반해 설명하려던 비평가들의 전제가 무엇인지를 말한다: 발화가 이야기로 변장시키는 담론적 요소를 찾고, 말하는 사람이 없는 듯 보이는 배우에 존재하는 화자를 찾아야한다.
이것의 세가지 예:
1. 마크 내시, 인칭대명사와 소유대명사에서 발견되는 개인의 표지에 대한 영화적 등가물은 <뱀파이어>에 있다. 1인칭 시점숏이랑 3인칭 이야기의 구성
2. 레이몽 벨루르, 서로 다른 모든 시각들이 생겨나는 중심지점, 즉 생산적이면서 동시에 텅비어있는 주체-감독의 장소를 발견할수 있는 히치콕의 <마니>. 인물이 카메라를 보거나 히치콕이 화면에 등장할때 이것은 더이상 카메라의 시선을 인물의 시점으로 제시하지 못하고 대신 자신의 바라보기/말하기를 명시화한다.
3. 마리 클레르, 로파르 위외미, 담론을 과시적으로 드러내는 영화<뮤리엘> ->이 영화를 일관된 이야기로 기술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설정숏부재, 불연속편집, 사운드와 이미지 분리,시간조작등)하다고 지적. 카메라의 자율성은 내레이터의 중재를 통해 시퀀스를 이애해야하는 언표행위 패턴을 만들어낸다.
이들의 이론은 세가지 어려움이 나타난다:
1. 방브니스트의 개념을 얼마나 고쳤는지 이야기하지 않는다. 메츠가 대표적. 메츠는 언어행위를 시각행위로 번역 [나를 본다면 담론적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이야기다]
2. 영화 내레이션에 관한 언표행위 이론에서 언어학 범주를 사용할 정당한 이유가 없다는 점. 언어학의 도입은 의미작용에 관한 일반이론 아래로 영화를 종속시키는 방법인가?등의 질문에 대답해야만 한다.
3. 이론가들이 유사성에 세부적으로 천착할수록 문제가 발생. 예를 들어 내시는 인칭의 점주만이 영화적으로 등가물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2인칭 이미지는 어떻게 보여야하는가? 영화에서 ‘너’에 대한 기능은 어떤 숏이어야하는가? 클로즈업? 롱샷? 모든 쇼트는 작가가 말을 건 흔적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2인칭 담론을 구분못한다면 개인의 범주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것일지도 모른다.
언어학적 범주에 따른 영화 나레이션 분석은 결국 체계가 기초하는 분석적 단위가 무언가에 대한 논의가 전혀없다는 사실이다. (ex>닉브라운은 카메라 셋업, 자클린 쉬테는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위치, 알랭 베르갈라는 카메라 워크나 편집, 로파르는 쇼트등으로 최소단위구분)

언어학적 이론의 견고하지 않은 까닭에 비평가들은 모방적 전통을 불러들였는데 이는 보이지 않는 관찰자 모델의 특권화한 두가지 특징인 카메라 워크와 편집을 언표행위의 근본적인 토대로 만들었다. [ex>편집 로파르:불연속몽타주, 벨루르: 운을맞춘 연속편집, 메츠:롱테이크보다는 편집된 경우가 더 개입, 브아운: 카메라의 이동은 언표행위] 사실상 말하기로서의 담론(방브니스트)에서 바라보기로서의 담론(메츠)로 변화하면서 카메라의 지위는 강화되었다.
누가 카메라를 통해보는가도 각양각색: 벨루르(담론 생산 주체) 로파르(내레이터) 내시(작가) 또한 한 영화의 세밀한 분석은 추상적 이론화를 차단한다: 내시<뱀파이어> 코드를 고집하는 것, 로파라는 모더니티에 초점. 벨루르의 경우 고전영화 몇편에 국한되었다.
-> 영화는 지시체계(인칭, 시제, 법등)가 부족하기 때문에 언표행위의 수단을 체계적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스티븐 히스는 유비를 피하고 내러티브 구조와 영화기술을 언표행위 이론에 일치시키겠다는 시도를 해왔다. 그는 ‘주체위치라는 개념에 호소함으로 모방적 가정으로 돌아간다. 재현은 담론의 문제라고 말하지만 뒤에가서 담론은 결국 이미지의 조직화, 시선과 구성에 대한 정의라고 규정한다. 1. 물리적 소실점 2. 공간감각 3. 내러티브 시점 4. 주체의 위치.
보드웰은 이 위치의 의미를 용어상으로만 연결짓는다. 논리적 관계를 보여주지 못한다고 비판. 즉, 의미 1은 의미3과 위치라는 단어의 심급이 다르다. 즉, 의미 2,3,4는 은유적이다. 히스의 설명은 결국 관찰자를 창조해야하기에 모방적인 가정들이 필요로 되어진다. <교수형>분석의 한계: 오시마 나기사의 영화는 모순적 주체위치를 제시한다고 말하는데 통상적 편집이 낳는 이상적인 관람위치의 붕괴는 어찌보면 다수의 예술영화가 제시하는 것과 다를바가 없다. 이것은 영화기술에 대한 모방적 설명을 개선하지 못했음을 증명한다.

언표행위이론은 영화스타일을 상세히 분석할 주된 동력이 되었으면 시네필이 내레이션을 더욱 정교하게 사유하게 만들어주었지만 보드웰은 언어행위의 가장 기본적인 면에 해당하는 것이 영화에 존재하지 않기에 언표행위의 설명을 버려야한다고 주장한다.

 http://cinekwon.egloos.com/1476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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