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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와이어의 리얼리즘과 유토피아, 프레드릭 제임슨

HBO에서 방영된 5부작 미드 <더 와이어>에 대한 마르크스주의 문예비평가 프레드릭 제임슨의 비평을 번역했다. 영어 원문은 인터넷에서 확인할 수 있다. 더 와이어는 소프라노스, 식스핏 언더, 등등과 더불어 명작으로 손꼽히는 미국드라마 중 하나이다. 저자인 프레드릭 제임슨은 오늘날에도 소원성취나 환상 없이 ‘유토피아’적 열정을 드러낼 수 있는 서사가 가능한가, 라는 질문을 중심으로 이 드라마를 비평하고 있다. 드라마에 관심 있는 독자들, 나아가 플롯구성이나 작가를 꿈 꾸고 있는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할만한 글이다.

BY : 박가분 | 2013.03.11                               http://hook.hani.co.kr/archives/48879

더 와이어의 리얼리즘과 유토피아

프레드릭 제임슨

대중 혹은 상업문화가 포스모니티의 실천에 있어서 점점 더 복잡화되고 하이브리드화되는 만큼 그것에 대한 장르적 범주화는 필수불가결하다. 예를 들어서 더 와이어는 경찰 연속극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것은 범죄조직물이기도 하다. 그 다수의 배우와 배역들은 흑인이지만 그것이 더 와이어를 흑인영화(흑인관객을 위한 영화)로 만들지는 않는다. 그것은 정치 드라마이긴 하지만 지역정치라는 그것의 속성은 그것이 볼티모어 내의 로컬 시리즈인만큼 볼티모어에 관한 로컬 시리즈(볼티모어의 엘리트에게는 그닥 구미가 당기지 않겠지만)이기도 하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동시에 오늘날의 탐정문학이나 범죄문학도 특정 지역이나 경관(스웨덴, 이탈리아, 심지어 중국과 같은 해외의 탐정물이거나 혹은 몬태나, 루지애나, 로스 앤젤러스, 토론토, 등등의 지역적인 탐정물)에 대한 소비에 기초해 있다. 가장 넓은 범주에서 더 와이어는 스릴러나 액션영화라고 할 수 있다(추격씬이나 땀을 쥐는 상황이나 군중씬 및 총격씬은 얼마 없지만).

 

5년의 TV 시리즈에서 한 해는 플롯과 테마의 단위이다. 그리고 한 시즌마다 수백명의 배역들이 등장하고 그 중 다수는 각자의 독립적인 플롯라인을 수행한다. 아일랜드계 미국인 탐정 지미 맥널티(도미닉 웨스트)가 유일한 주요 주인공이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의 위상은 시리즈의 5년 동안 변동하고 자주 다른 배역에 의해 가려진다. 말하자면 이러한 종류의 작업은 주인공과 “보조배역”(혹은 스타와 “캐릭터 배우”) 간의 구분에 도전하고 그것을 문제화하는데 내가 보기에 이는 대부분의 경우 “서사시”(전쟁과 평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간주된다. 그러나 그러한 특성화는 이러한 종류의 플롯(Alexander Woloch의 보조배역에 대한 논의를 보라)에서 이뤄진 역사적 발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을 강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시리즈마다의 에피소드들은 Homicide(각본/연출을 맡은 데이비드 사이먼의 이전 시리즈이며, 마찬가지로 볼티모어를 배경으로 하고 일부 동일한 배우를 기용했다)처럼 서로 분리되거나 독립적이지 않다. 따라서 이는 디킨즈의 것과 유사한 시리즈물 혹은 연속물이다. 그리고 특히 텔리비쥬얼 미학에 대한 탐구는 메인플롯의 전개과정과 무관하게 개별 배우-배역에 대한 매혹을 파헤치려 할 것이다. 메인플롯에서의 좌절과 매주매주의 지연(심지어 고의적인 연기나 종결의 불가능성에 대한 감각)―이 모든 것들은 DVD 대여에 의해 의문의 여지가 있지만―은 고유한 시간성에 의해 각인된 상이한 방향으로 이뤄지는데 그럼에도 그 리듬은 결국 반복으로 재조직된다. 반복은 자족감과 안정감에 있어서 텔레비전의 기능을 향상시킨다. 텔레비전과 함께 있을 때 수많은 익숙한 얼굴과 캐릭터들에 의해 둘러싸이기 때문에 당신은 외롭거나 고립되지 않는다. 다른 한편에서 이러한 특성이 신경증적 부인으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에 텔레비전은 지루함과 무기력함 혹은 신경증적 강박이나 마비의 가능성을 영속적으로 가져올 수 있다. 그래서 텔레비전 프로그램은 보조적인 이데올로기적 문맥 즉 “가치”의 쇼 윈도우를 가용하게 만들어야 한다. 예술 혹은 작품성이 그 중 하나일 수 있지만 또한 “오락” 혹은 휴식/여흥(예를 들어 긴 노동 이후)―유사개념이 되겠지만―역시 그러하다. 그리고 거기에는 정치적이거나 사회적 메시지를 통한 알리바이 그리고 케이블 채널의 “문화자본”(이 경우 HBO는 물론 자신이 단순한 텔레비전 채널 이상이라고 주장한다)도 있을 수 있다. 또한 개별 에피소드에 저마다 다른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저명한 작가와 감독들(George Pelecanos, Agnieszka Holland)이 참여했다는 사실에 의해 주어지는 예술적 보너스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에는 더 와이어를 범죄 스토리로 접근할 것이다. 말하자면 그것은 경찰과 범죄갱단(그들 대부분의 범죄는 마약밀매이다)이라는 두 집단 간의 투쟁을 그린다. 각 집단의 재현에는 장구한 역사가 있다. 그리 멀지 않은 과거 대중문화에서 제도권의 경찰이 사립탐정의 전통 속에서 나타난 반면 조직범죄는 금주령 기간 동안 점차적으로 재현의 대상이 되었다(이들과 “마피아”, “코사 노스트라”와의 인종적 정체화는 나중의 일이다). 이런 종류의 대중문화적 재현은 일종의 재인지이다. 그것은 문제가 되는 집단이나 존재에 무언가 제도적인 지위를 부여하며 이에 해당 집단에는 객관적인 사회적 현실성이 부여된다(그래서 우리는 소위 말하는 마피아의 실제 구성원들이 소프라노스(1999-2007)를 시청했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어쨌든 그러한 재인지는 사회가 정태적이고 안정적이라는 느낌에 확신을 준다. 주변지역은 지속적으로 지도 그려지는데 만일 이러한 사회적 지리에 변동 혹은 변화가 생긴다면 그것은 잘 공표될 것이고 따라서 모두가 렉싱턴 테라스에는 폴란드 인들이 아니라 흑인들이 산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기타 등등.

 

하지만 이러한 지도그리기는 단순하지 않다. 그것은 공간적일 수 있지만 대상과 물질을 목록화하는 것이 아니라 되려 흐름과 에너지에 가깝다. 하지만 어떠한 사회적 재현이든 간에 그 본질적 재료는 사회적 유형, 장르적 유형(“주인공”과 같은) 혹은 심리적 유형과 같은 전형화된 유형에 묶여있다. 더 와이어도 그런 인지 가능한 유형적 존재들을 모든 층위에 배가시키므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것이 얼마나 독창적이고 혁신적인지는 그것이 그러한 유형적 차원에서 가져올 수 있는 수정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창조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에 달렸다. 특정 모더니즘 사조는 이러한 유형화의 문제를 그 유형들에 과도하게 미시적으로 다가감으로써 그것이 기반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차원을 점진적으로 사라지게 하고 그 유형들을 개별성과 특이성들로 해소시키는 방식으로 대처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도 익숙한 유형을 출발지점으로 삼아야 하고 한편에서는 새롭고 더 주관적인 유형의 출현과 다른 한편에서는 외재적인 사회적 출발지점으로의 아이러니한 회귀라는 이중적인 위험에 노출된다. 이 “유형”이라는 단어는 물론 게오르그 루카치의 리얼리즘 이론과 연관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이 개념의 역사적 출현에 주목하는 대신 그것을 사전에 주어진 사회적 혹은 계급적 유형의 개념으로 가정하는 것은 그의 위대한 문화적 그리고 이론적 작업을 세공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쨌든 더 와이어는 우리를 단번에 통상의 공식을 상당히 초월하는 인식론적 탐험으로 이끎으로써 우리의 유형학적 기대와 관습을 뒤흔든다. 확실히 이 시리즈는 그 해결 실마리가 희생자의 다가올 다른 갱단영역 살인사건에 대한 법정증언과 명백히 관련 있는 것으로 보이고 주요 특이사항이 희생자의 인종(백인)에 있는 평범한 살인 사건과 함께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곧 경찰 자신들은 갱단의 조직구조와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들의 신원 및 출신은 물론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된다. 제복경찰들은 단지 마약이 어떤 지역과 어떤 거리에서 일부는 기소되기에 너무 어린 청소년 패거리에 의해 최종적으로 소비자들에게 팔리는지만 안다. 하지만 항상 그렇듯이 이것은 현실의 단순한 외양, 일상 속에서 현실이 취하는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에 대한 가장 피상적인 접근이며 여기서 현실의 궁극적인 구조(마약출처, 정제과정, 운반책, 판매상 네트워크, 큰손 혹은 도매상)는 비록 인식되고 연구될 수 있지만―그리고 나중에 더 와이어에서 다양한 형식의 탐구를 통해 간혹 재현적인 방식으로 감지될 수 있지만―개별 관찰자가 경험하기에는 지나치게 추상적인 것으로 남아있어야 한다. 물론 매개적 현실―소위 말하는 마약왕 자신들, 여기서는 에이본 박스데일(우드 해리스)―은 공공연히 알려져 있지만 거리의 경찰들은 그것을 모르며 초반의 에피소드에서 이름만 알고 나중에 가서야 그가 라이벌 갱과의 농구시합을 주최할 때 그의 얼굴과 신원을 겨우 일별하게 된다. 이것은 그가 권좌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가 혹은 단순히 경찰이 조직 상층부에 수사력을 예전부터 집중해오지 않았기 때문인가? 혹은 어쩌면 마약거래 역시 사업인 만큼 이전에 경찰관들이 그것을 합법적 사업의 형태 및 구조와 연관시키지 못했기에 올바른 질문을 던지지 못한 것일 수 있다. 무엇이 이유든 간에 자신의 도시에 대한 이러한 무지는 급작스럽게 리얼리즘을 위한 공간을 개방한다. 이 공간에서 비로소 무언가를 보고 무언가를 발견하고 무언가를 조사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과학적 실험이나 고전적인 탐정물에서처럼 원인을 추적하는 것이 등록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범죄자 개인이 범죄의 수수께끼에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전체 사회가 재현에 개방되어야 하고 새로운 차원 혹은 외국 문화처럼 추적되고, 식별되고, 탐사되고, 지도 그려져야 한다. 그때부터 “박스데일”은 수사와 등록의 새로운 수단을 필요로 하는 전체 사회구성체의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새로운 사회적 동학을 추적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새로운 리얼리즘이 발명되어야 하듯이).

 

이러한 사회학적 미스터리는 어느 정도까지 탐정수사 혹은 퍼즐풀기의 표준적 플롯형식으로 환원될 수 있는가? 나는 이러한 형식―혹은 그러한 형식에서 얻는 우리의 만족이라고 말하는 게 나을 텐데―의 보다 심층적인 동기를 프로이트의 원초적 장면(이는 또한 자연을 파헤치려는 과학자들의 열정을 뒷받침한다)과 관련지어 생각하게 된다. 혹자는 프로이트적 유형의 이러한 만족은 절대 완성될 수 없다는 것을 덧붙이고 싶을 것이다. 어떠한 만족도 실제로는 충족될 수 없기에 그것은 좌절감을 남긴다. 에드문드 윌슨은 잘 알려진 바대로 탐정 스토리를 하찮은 장르로 격하하면서 “누가 로저 애크로이드를 죽였는지 관심 있나?”고 반문했다(이 언급은 애거서 크리스티의 독창적인 돌파로 평가받는 추리소설[로저 애크로이드 살인사건, 1926]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추적에 대한 열정과 사냥감의 우연성과 하찮음 사이의 괴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용상의 이러한 고유한 괴리는 텔레비전 연속극에서는 그 자체의 형식으로 기능하는데 거기서 그것의 궁극적 만족은 절대 충족되지 않아야하며 우리들은 더 나은 것에 대한 보다 큰 희망으로 되돌아오도록 동기부여되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이러한 더 높은 문화 혹은 문학에 대한 불만족은 그러한 불완전성에 대한 긍정을 구성하도록 전유될 것이다. 우리들은 절대 그리스인을 잡지 못하며 엔딩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남는다. 여기서 불완전성은 그저 누가 법정에 오르든 간에 마약거래는 재개될 것이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것이고, 지속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더 와이어는 다소 천박하지만 열정적인 박스데일이 결국 잔혹하고 냉정한 말로 스탠필드(그도 마지막에는 비록 서툴지만 어엿한 부르주아 비즈니스맨이 된다)로 교체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러한 운명적 반복을 사회사에 각인한다.

 

여기에는 미스터리와 비극경연 간의 불가피한 긴장이 놓여 있는데 우리들은 악당들의 눈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따라서 경찰들이 아직 시도하지 않은 어떤 해결책이 있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여전히 미스터리 포맷을 살리는 것은 그런 발견이 쇠사슬의 연쇄처럼, 밧줄의 매듭처럼 차근차근 이루어진다는 데 있다. 그것은 우리를 무언가에 더 가까이 가도록 이끌며 여기서 서스펜스의 일부는 “누가 했는지”에서 “어떻게 법적 증거를 확보할 것인지”로 전치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더 와이어의 다른 측면에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발견” 혹은 해결책은 전체 환경, 평화-애호적인 부르주아 시만사회로부터 배제된 부분사회 내지는 전체사회의 세계에 관한 것일 뿐만 아니라 “탐정” 역시도 그러한 세계의 일원이고 공모자이다. 전체 경찰조직은 그러한 하나의 기관이고 고유한 정치적 음모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고 마지막 시즌과 에피소드들에서 수면에 떠오르게 되는 숨겨진 정치적 차원인데 그것은 나중에 공식적인 선거 켐페인으로 전환된다.

 

하지만 이러한 경찰기관은 자신의 수사타겟을 식별하는 데 있어서 거의 무능하고 한편에서는 타겟의 이름조차 모르며 다른 한편에서는 그것이 수사하는 범죄의 본성과 그들 간의 내적관련에 대해 짐작조차 못한다. 고독한 사립탐정 혹은 헌신적인 경찰관은 낭만주의적 영웅과 반항아(아마도 밀턴의 사탄이 최초일 것이다)에서 연원하는 익숙한 플롯을 제공한다. 점차 사회화되고 집합적이게 되어가는 역사적 공간에서 진정한 봉기 그리고 저항은, 음모가 그룹, 진정한 집단(사르트르는 그것을 연속적인 대중사회 내의 융합된 집단의 형성이라 부를 것이다)의 형식을 취해야 한다는 것이 이곳에서 서서히 분명해지고 있다. 여기서 지미 자신의 반항기질(못 말리는 이상주의와 더불어 권위에 대한 불복종, 알코올중독, 성적일탈)은 있을법하지 않은 조합의 동료와 공모자들을 만나게 된다. 레즈비언 경찰, 영리하지만 믿음직스럽지는 않은 한 쌍의 경찰, 비밀스러운 과거가 있지만 이러한 흔치 않은 모험만이 승진의 기회를 줄 것이라는 직감을 가진 경감, 나중에 숫자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는 둔하고 이기적인 낙하산 인사, 다양한 사법적 조력자, 마지막으로 과묵하고 잘 나서지 않는 해결사.

 

마지막의 인물―더 와이어의 진정한 영웅―은 제목에 대해 무언가 말하도록 우리를 이끈다. 여기서 와이어는 우리가 옷으로 입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으로 말하는 도청을 의미한다. 옛날 영화들을 지금에서야 보면 휴대전화의 도입이 미스터리 혹은 어드벤쳐 영화의 플롯구성뿐만 아니라 통화를 추적하고 도청하는 것―이에 관한 복잡성은 여기서 상세하게 탐구될 것이다―과 관련된 구성적 문제를 어떻게 급격하게 변화시켰는지 분명해진다. 하지만 레스터 프리먼(클라크 피터스)의 천부적 재능은 이러한 문제들을 독창적인 방식으로 풀뿐만 아니라 일부 순수한 미스터리적이고 탐정물적 관심사를 건축적이고 물리적인 혹은 공학적인 문제해결에 대한 매혹으로 옮겨놓는다. 말하자면 추상적인 추론보다는 손재주에 더 가까워지는 것이다. 처음에 발굴되어서 특별수사팀에 합류할 것을 권유받을 때만 해도 프리먼은 남는 시간에 앤티크 가구 미니어쳐를 조립(그의 부업이다)하는 데 소일하는 사실상의 퇴물경찰관이었다. 이는 인간과 그의 지적 생산성의 낭비에 대한 우화이며 그런 생산성이 그의 열정과 창조력을 여전히 흡수하는 보다 사소하지만 십자말맞추기보다는 그나마 더 나은 활동으로 전치되는―이마저도 운이 좋은 경우지만―것에 대한 우화이다. 하지만 레스터는 또한 먼지투성이 파일과 증거들과 긴 시간을 씨름하는 데 유능한 사서-학자 유형인데 그 덕분에 도시 전체의 금융비리를 들춰내게 된다. 그리고 많은 그의 동료 경찰관들이 알 턱이 없는 박스데일의 유년기 권투선수 시절 사진을 발견한 것처럼 그는 커뮤니티 내에서 남모르는 귀중한 인맥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는 많은 동료경찰들에게 있어 탁월한 멘토이기도 하다. 결국 더 와이어는 단지 (갱과 경찰 양자의) 집합적 동역학의 재현을 보여줄 뿐만 아니라 노동과 생산 그리고 실천의 재현을 보여준다. 이 두 경우에서 모두 잠재적 유토피아, 유토피아적 충동이 비록 스스로를 이와 다른 유토피아적 프로젝트 혹은 강령으로 단언하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하지만 레스터의 창조성은 다른 측면에서 대응물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아직 박스데일의 행동대장인 스트링거 벨(아이드리스 엘바)을 언급하지 않았는데 그는 고전적인 정치상황에 비견하자면 총리 혹은 집행간부와 같은 위치에 있다. 경찰 자신들은 이러한 이중적 조직구조의 열등한 판본을 가지고 있는데 그곳에서의 제 2인자는 어떤 점에서도 벨만큼이나 냉정하지도 유능하지 않다. 스트링거는 사실 진정한 인텔리였고 경찰(그리고 시청자들)이 마침내 그의 아파트에 침입할 때 그들은 예상치 못하게 현대적 양식의 가구와 해박한 예술적 취향의 인테리어를 발견하게 된다. 그의 이러한 모습은 긍정적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그가 사실상 대부분의 중대한 살인들을 일말의 죄책감 없이 지시했다. 그가 여전히 절대적으로 헌신하지만 당사자는 그의 지성을 부러워하고 때로는 질투하는 것 같아 보이는 박스데일과 그의 상호관계는 예외적일만치 농밀하고 미묘한 대인적 상황을 자아내며 더 와이어는 이를 통해 더 큰 플롯을 자아낸다.

 

충분히 명백하게도 경찰은 처음에 박스데일이 누구인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코너를 방문하고 길거리에서 몸소 업무를 감독하는 드문 순간을 제외하고 스팅어의 존재를 눈치 채지도 못한다. 어느 날 지미는 이러한 수수께끼의 인물을 추적하기로 홀로 결심한다(나중에야 그가 박스데일을 위한 부동산 투자의 모든 확장을 지휘한다는 것이 레스터의 예외적인 창조적 탐구력과 노하우를 통해 점진적으로만 드러나게 된다). 여하튼 그의 차는 지미를 대학으로 그리고 강의실로 이끄는데 그곳에서 지미는 창문을 통해 마약대부이며 갱스터인 그가 경영수업을 들으며 충실히 질문에 대답하고 과제를 하는 것을 보게 된다. 확실히 해두자면 우리는 실제 역사 속에서 이윤을 척도로 범죄갱단을 그렇게 재조직한 이들(내가 알기로 러키 루치아노는 이러한 마피아의 사례이며 로베르토 사비아노의 고모라(2007)는 이에 대한 생생한 현대적 사례를 보여준다)을 상기하는 것을 잊곤 하는데 마피아와 기업체 간의 비교는 그런 점에서 단지 은유적이거나 비유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결정적 순간에 우리는 위와 유사한 거의 미학적인 창조성을 보게 된다. 스트링거는 박스데일의 패거리를 점차 재조직하고 상품, 경쟁, 투자와 같은 단어를 사용한다. 그는 사업(la douceur du commerce: 그것은 중세적 야만성을 길들인다)에 언제나 해로운 살육전을 피하도록 갱들을 종용한다. 나는 이 문맥에서 의도적으로 창조성이라는 단어를 여러 차례 사용했다. 상당히 정체되어 있고 모든 오랜 문제점들과 역기능을 일으키는 통상적인 관례대로 운영되는 데 만족하는 관료사회 속에서 어떻게 이 요소가 원유토피아적인 것으로 보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지점에서부터 이미 더 와이어는 정적인 현실을 복제하거나 기존의 모방적이고 자가복제적인 의미에서 “리얼리스트”가 되는 것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다양한 차원의 미시적 레벨에서 이곳의 사회는 숙고된 변화의 과정에, 인간의 프로젝트에, 관습과 전통의 단순한 관성이 아닌 유토피아적 의도의 실천에 종속된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나는 우선 유토피아주의에 대한 논의를 플롯구성의 문맥 안에 위치시키고 그것이 순수한 학문적 주제만은 (물론 학문적인 주제이지만) 아니라는 것을 보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양자의 주제를 전체로서의 대중문화라는 보다 넓은 맥락 안에 위치시키고 싶다. 플롯구성은 대본이나 시나리오에 관한 모든 책과 세미나들에서 보이듯이 명백히 대중문화 안에서는 실천적 중요성을 지닌 문제이지만, 또한 그것은 명확히 해당 주제에 대한 기술적인 지침이나 매뉴얼로 소진되지 않는 이론적이고 철학적인 차원을 가지고 있다.

 

플롯 구성의 철학적 의미는 플롯 혹은 스토리를 구성하는 것을 가로막는 것이 무엇인지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물론 고유의 역사적 측면도 지니고 있다. 과거의 문학―과거의 연극적 스펙터클뿐만 아니라 유행에 뒤떨어진 다양한 문화 속에서 살아남은 대중문학―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통하지 않을 플롯의 풍부한 사례들을 제공한다. 예를 들자면 감정과 그것의 표현 그리고 그 변천에 관한 역사가 있다. 아도르노는 모더니즘 문학의 목적론이 너무 센티멘털하고 너무 익숙하고 너무 진부하고 전형적이어서 더 이상 예술작업에 사용될 수 없는 것들에 대한 터부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언급한다. 그리고 이러한 목적론은 비록 반복의 희열이 그 안에서 보다 중심적 역할을 수행하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대중문화에 대해서도 적용된다. 모더니즘 문학은 반복에서 벗어나거나 혹은 최소한 반복을 좀 더 고결하거나 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것으로 번역하려 모색했던 반면 대중문화는 틀에 박힌 것이라 불리곤 했던 것 위에서 번성한다. 당신은 똑같은 상황, 똑같은 플롯, 똑같은 종류의 캐릭터들을, 당신이 더 이상 똑같은 것을 처음부터 다시 보고 있지는 않으며 흥미로운 뒤틀림과 변이가 당신의 관심사를 충족시켰다고 스스로를 확신시킬 수 있을 만큼 그럴싸한 수정을 가미한 채로 보고 싶어 한다. 그럼에도 종래의 패러다임이 축적의 순전한 무게와 진부함에 대한 피로감에 굴복하는 순간이 오게 된다.

 

하지만 나는 그러한 형식의 소진에 관한 다른 설명을 찾고 싶다. 그리고 그것은 형식의 소재 속에서 발견되어야 한다. 만일 어떤 소재가 즉각적으로 과거의 패러다임에 적응하는 것이 가능하다면 소재의 부재가 과거의 패러다임을 신선한 방식으로 수정하는 것도 가능하다. 우리는 과거에 소재를 제공했던 다양한 역사적이고 사회적 상황을 안다. 한 가지를 들자면 지방과 도시의 대결구도, 그리고 그 결과로서의 새로운 도시의 성장. 산업자본주의, 해외여행과 이민, 제국주의, 새로운 유형의 전쟁, 식민화, “기층”의 도심슬럼과 시골집, 헨리 제임스가 말한 “고풍스러운 농부들”. (물론 그의 소책자 호손은 특정 종류의 소재를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 문학과 그것의 형식적 가능성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논한 정초적인 문서이다―그는 여기서 미국에 대한 유럽의 이점을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제 순문학에서 탐정물이라는 대중문화적 장르 및 하위장르로 돌아가자. 영국식의 조용한 시내와 마을, 회랑으로 둘러싸인 배경의 부재는 (과거의) 영국식 탐정물의 창작을 미국에서는 어렵게 만들었다. 하지만 우리는 살인이라는 불가결한 구성요소에 초점을 두고 모티브들의 축소를 가늠해야 한다. 예전에는 단지 다양하고 흥미로운 모티브들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조사할 다양하고 흥미로운, 오늘날에는 멸종한 것으로 보이는, 사립탑정들이 있었다. 사회적 체면은 스캔들과 체면의 훼손 가능성이기도 하다. 예컨대 가족구조와 왕족 혹은 씨족 시스템, 모든 종류의 열정과 강박, 증오와 복수심과 다른 복잡한 심리적 기제들. 이 모든 것들은 현대사회의 순응성, 뿌리 없음과 끊임없는 이동 그리고 몰지역성, 개성과 기묘한 기벽과 강박의 상실, 한 마디로 일차원성의 증가 속에서 갈수록 무의미한 것이 되어가고 있는 행위동기의 흥미로운 원천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오늘날 틈새상품들의 증식과 “라이프스타일”의 차별화는 모든 것을 가격태그로 환원하며 행위동기를 순전히 화폐적인 것으로 수렴시키는 것과 역설적으로 맞짝을 이룬다. 여기서 화폐에 대한 다양한 추구가 예전에는 흥미로웠다면 오늘날에는 그것에 대한 추구가 행위의 보편적 동기가 되었다는 점에서 극도로 지루한 것이 되었다. 모든 국민적 정치의 어휘목록들 속에 있는 탐욕이라는 단어의 편재성은 최근에는 이러한 동기의 뻔함을 은폐하는데 거기에는 과거의 사회적 충동과 과거의 문학이 자신의 원천으로 삼은 지닌 열정적이고 강박적인 특성이 전혀 없다. 다른 한편 심리적 영역 역시 극적으로 축소되었는데 아마도 이는 부분적으로는 범용화된 동기로서의 화폐가 지닌 편재성의 결과이며 이는 또한 보편화된 정보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친숙함과 개성상실의 결과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곳에서 위르겐 하버마스(의사소통이론, 1984)가 새로운 종류의 이성의 확산과 연관시키는 이 보편적인 커뮤니케이션의 평등이 또한 우리가 이제 이해할 수 있는 행위들의 확장에 기여한다는 것을 관찰했다. 우리가 예전에는 병리적인 것으로, 정신상태의 결함으로, 도리에 벗어난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이제 모두 다 인간적인 것, 너무나 인간적인 것이 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그 같은 방식으로 악이라든가 혹은 절대적 타자성이라는 고유의 범주들이 극적으로 설 자리를 잃었다. 홀로코스트를 조직한 이들이 단지 일개 관료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절대악을 표상할 여지를 확실히 축소시킨다. 대부분의 병리성이 무섭기보다는 한심하고 편협해 보일 뿐이라는 것은 이성과 자유주의적 관용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선과 악이라는 유행에 뒤떨어진 윤리적 이항대립에 집착하는 이들에게는 여전히 손실이기도 하다. 나는 다른 곳에서 이러한 이항대립을 논박한 바 있다. 가령 아마도 니체는 이러한 이항대립이 단지 그 자체가 산출하려 하는 타자성의 사후적 이미지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가장 극적이고 유일무이한 예언가였을 것이다. 선은 우리들과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며 악은 우리와 (어떤 유형이든) 발본적으로 다른 사람들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회는 어떠한 이유에서든 간에 (그리고 아마 좋은 이유에서) 차이와 더불어 악 그 자체도 소멸하고 있는 곳이다.

 

이는 로맨스와 더불어 대중문화의 주상품인 멜로드라마적 플롯이 가면 갈수록 지탱 불가능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악이 없다면 악한들 역시 불가능해질 것이다. 그리고 화폐가 유일한 이해관심사가 된다면 그것은 압도적인 규모로 악덕자본의 부호와 우두머리들에게서 나타나야겠지만 이는 오늘날 확실히 점점 더 그 극적 개연성이 낮아지고 있는데다가 그들의 현존은 어느 경우든 정치적인 측면에서 고전적인 플롯을 다시 가져오는데 이는 정치를 외면하는 대중문화에 어울리지도 않는다(혹 그것이 정치로 관심을 돌린다면 우리는 그 이후에 정치 자체에서도 무엇이 일어났는지를 묻기 시작할 것이다. 냉소적 이성의 지배는 정치적 부패 일반과 정치와 금융시스템의 부패한 공모에 대한 남용된 비난의 편재성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 정의상 보편화된 냉소적 지식은 더 이상 어떠한 정치적 결과도 사실상 내놓지 않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따라서 두 가지 수렴하는 문제에 직면한다. 한편에는 과거의 멜로드라마적 플롯형식의 반복은 점점 더 지루한 것이 되어 가고 지탱하기 어려운 것이 되어 간다. 다른 한편에는 그러한 형식의 실천을 위한 소재 혹은 내용은 일면화 되어가고 있다. 악은 사회적으로 소멸하고 있으며, 악당들은 굉장히 드물어졌으며, 모든 이들은 엇비슷하다. 유토피아 성향의 작가들은 그들만의 완벽한 세계 속에서 이미 문학의 가능성 자체에 관한 문제에 봉착했다.

 

이것은 왜 악의 범주 속에서 대중문화적 악당형상의 두 가지만 홀로 살아남았는지를 설명한다. 진정한 반사회성에 대한 이러한 두 재현물들은 한편에서는 연쇄살인마이고 다른 한편에서는 테러리스트(인종이 종교와 동일시되고 공산주의자와 아나키스트 같은 세속적인 정치적 옹호자들을 더 이상 불러낼 수 없기에 이들은 대부분 종교적 성향을 띠고 나타난다). 섹슈얼리티 혹은 소위 말하는 정욕적인 동기는 오래전부터 길들여졌다. 우리는 사도마조히즘에서 호모섹슈얼까지 그 모든 것을 이해한다. 다만 아동성애는 여기서 사소한 예외인데 이들은 연쇄살인마(항상 그런 건 아니지만 이들은 일반적으로 성적으로 동기화된 자로 이해된다)라는 더 큰 범주 내의 하위그룹 혹은 하위가능성으로 분류된다. 콜럼바인 유형의 대량살상 이후 테러의 정치적 차원은 그늘지기 시작하며 테러가 과도한 믿음의 타자성과 종교적 광신의 측면에서 조직된 것으로 재출현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그 외의 다른 어떤 이해의 여지도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테러리즘을 순수한 정치적 전략으로 이해한다면 이후 그 전율 역시 상당부분 증발해버리며 우리는 그것을 마키아벨리나 정치적 전략과 전술 혹은 역사에 대한 토론에 의탁하게 된다.

 

테러리스트와 연쇄살인마라는 이들 두 주요상품들이 “탐욕”에 의해 이끌리는 악한들만큼이나 지루한 것이 되었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냉전의 종언 이후 애석하게도 스파이 소설이 소멸한 이후 그러한 지루함은 멜로드라마가 종언에 이르고 있다는 징조로 보이며 그것은 나아가 대중문화 그 자체의 종언을 위협한다.

 

이러한 플롯구성의 딜레마라는 맥락 속에서 우리는 이제 시즌2와 더 와이어에서의 어떤 유토피아주의의 최초의 잠재적 출현으로 돌아갈 수 있다. 시즌2는 볼티모어 항구와 노동조합과 그것의 부패와 더불어 외부의 마약공급 네트워크 전체(그리스인)를 다룬다. 가면 갈수록 퇴락해가는 항구의 장대한 광경과 컨테이너 기술은 더 와이어의 장소와 장면(케네스 버크의 의미에서)에 관한 모든 질문의 우회적인 접근을 요구한다. 장소는 물론 볼티모어이다. 그리고 누구든지 언뜻 볼 때 이 시리즈를 “high literature”(레이몬드 카버, 등)만이 아니라 지역주의로의 “포스트모던”한 회귀로 분류하려는 충동을 느끼는 것은 이해할만하다. 나는 전 세계의 탐정물과 탐정소설과 로컬하고 지역적인 충실성 사이의 구성적인 관계에 대해 언급했다. 한편으로 “세계 시네마”는 그것이 로컬 관객들에게 얼마나 충격적이든 간에 이러한 충실성을 사실상 문자 그대로 만드는데 이는 국제화된 영화 페스티벌 문화가 국민적 생산에 의해 조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더 와이어에서는 몇 가지 흥미로운 구분이 행해져야 한다. 한 가지로 지역성은 항상 암묵적으로 상대적인 것이다. 작은 읍 혹은 사막지형 혹은 심지어 교외에 방점을 둔다면 부패하고 오래된 동쪽의 대도시가 아니라 우리가 다르게 사는 몬타나 혹은 더 싸우스 등등으로 지역을 구분해야 한다. 와이어에서는 아무도 다른 지리, 다른 도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는다. 볼티모어는 그 자체로 완결된 세계이다. 그것이 실제로 닫힌 세계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 바깥에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전달하기 때문이다. (아무도 고립되었다고 느끼거나 무언가가 진짜로 일어나고 있는 이런 저런 중심으로부터 떨어져 있다고 느끼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지방적이지 않다) 확실히 아나폴리스가 (주 수도) 참조점이 되는데 예산상의 결정들(특히나 경찰에 대한)이 거기서 이뤄진다. 필라델피아는 동떨어진 참조점이 되는데 갱단의 구성원들이 가끔씩 그곳을 들려야 하기 때문이다. 뉴욕은 당신이 킬러들을 고용하거나 매우 특별한 경우에 외부에서 낯선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가는 곳이다. 어디서 그리스인들이 마약을 얻는지는 전혀 추측의 (혹은 주관적인 지도 그리기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심지어 자연(그리고 해안가)도 존재하지 않는데 가령 그것은 볼티모어로 돌아가서 살해당하기 전 잠시 할머니와 함께 은신하기 위해 유폐된 한 불행한 청소년(왈라스, 마이클 B. 조던)을 당혹스럽게 할 뿐이다. 볼티모어는 거리의 코너―경찰본부, 법정 그리고 시청―들인데 이 때문에 볼티모어라는 고유지명은 (TV 시청자들과 지역적 자부심을 제외한다면) 무관한 것이다. 선착장과 항구가 비록 모든 이해관계와 부패의 네트워크와 연루되어 있다 해도 실제로는 비어 있는 공간이다. 그리고 인근의 기항지 혹은 선박들이 거기에 무엇을 하역하든 간에 그것은 전혀 기록되지도, 상상되지도 않으며 따라서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좋을 만큼 무관한 것이다.

 

노조의 리더는 폴인데 그의 등장은 또한 더 와이어에서 인종을 환기시킬 순간이기도 하다. “볼티모어”는 비실재적인 개념이지만 여기서 인종은 그만한 존재감이 있는데, 특히나 당신이 경찰을 비유적이고 도덕적인 의미에서 인종적 범주에 포함시킬 때, 그리고 그들 사이에서 여전히 아일랜드 전통이 두드러진다는 이유에서 그렇게 할 때 그러하다. 하지만 흑인들은 그러한 의미에서 “인종”이라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미 박스데일에 의해 운영되는 마약구역을 보았고 거기에는 흑인들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여전히 공식적인 도시 안의 다른 외국 도시처럼 존재한다.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이며 당신이 사업상의 이유가 없는 한 가지 않는 곳이다. (여기서 “당신”은 공식적인 주류 백인 문화의 일원이다) 따라서 절대적인 지리적 근접성 속에서 여기 이 두 문화 전체는 어떠한 접촉이나 상호작용 없이, 심지어 서로에 대한 어떠한 지식도 없이 존재한다. 할렘과 나머지 맨하탄이나 웨스트 뱅크와 한때 그 일부였던 이스라엘 도시들처럼 말이다. 심지어 이는 오늘날 동베를린과 서베를린과도 유사한데 나이 든 동베를린 시민들은 여전히 이전의 서베를린으로 가기를 꺼려하는데 그곳의 아무런 전통도 없는 휘황찬란한 상점과 그들 대부분의 생애에서 낯선 그 모든 자본주의적 문화 때문이다.

 

여전히, 이것은 본질적으로 흑인 시리즈로 간주될 수 있다. 그것의 배역 대다수는 흑인이며 그것은 수십 명의 고용불안정 흑인뿐만 아니라 지역의 비숙련노동자들을 출연시킨다. 볼티모어 자체가 흑인이 압도적으로 많은 도시이다. 하지만 이전의 Homicide: Life on the street 시리즈에서 관찰되듯이 이러한 인구상의 우세함은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흑인들(사회적으로 직업상으로 심지어 신체적으로)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결국 범주 자체를 완전히 해소하기에 이른다. 여기서 더 이상 “흑인” 같은 것은 없으며 그런 의미에서 흑인의 사회적이거나 정치적 연대 같은 것도 없다. 그러한 이전의 “흑인”들은 이제 경찰이다. 그들은 또한 범죄자나 감옥 수감자일 수 있고, 교육자일 수도, 시장이나 정치인일 수 있다. 더 와이어는 그러한 의미에서 시쳇말로 후-인종적post-racial이다(이것은 확실히 미국에서 대중을 전반적으로 바라보는 데 있어서 정치적인 영향을 미치는데, TV의 존재나 수많은 유명 흑인 연예인들은 인종주의에 불가결한 인종적 스테레오타입이나 낯섦에 그만의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폴란드인들은 여전히 인종적 집단인데 예컨대 노조 리더인 프랭크 사봇카를 마침내 몰락시키게 되는 그를 향한 폴란드계 총경의 맹렬한 복수를 본다면 그렇다. 사봇카의 인종은 그의 노조 리더로서의 역할과 다소 미묘하긴 하지만 얼마간 동떨어져 있다. 그리고 그 역할 주위로 마침내 어떤 유토피아주의가 불려 모인다. 볼티모어 항구의 죽음은 컨테이너 자동화 기술(2006년에 출간된 마크 레빈슨의 『더 박스』를 보라: 한국어본은 2008년 21세기북스에서 출간)과 그것이 노동운동(더 적은 노동자들만이 필요해지며 이는 한때 막강했던 부두 노동자 조합의 몰락으로 이어진다)뿐만 아니라 도시(뉴아크, 뉴저지 항구의 컨테이너 자동하역 기술의 발전은 급작스럽게 동쪽 해안의 볼티모어 같은 경쟁항구들을 쓸모없게 만든다)에 미치는 영향과 관련이 있는데 오랜 선착장들은 이제 언뜻 봐도 지미가 좌천되서 보내진 경찰 보트를 위한 것으로 전락했다. 이는 세계화의 파괴력이 보다 광범위한 탈산업화와 더불어 수용되는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는 단지 볼티모어를 파괴한 더 저렴한 국가로의 노동이동의 사례일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기술이 확산(물론 이는 해외의 항구를 발전시키고 산업생산과 무엇이 운송될 것인지를 바꾸면서 세계화의 충격을 광범위하게 증폭시킨다)되는 사례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줄거리는 더 와이어의 배경일 뿐 그것의 주요교훈이나 메시지는 아니다.

 

메시지는 전혀 다른 곳, 프랭크 사봇카의 부패혐의(지미 호파 이래로 노동조합과 전형적으로 결부지어지는)를 재맥락화하는 데 놓여 있다. 확실히 프랭크는 마약거래와 깊이 연루되었으며 그는 그리스인들이 그의 컨테이너를 밀수하도록 허용한다. 하지만 프랭크는 돈에 관심이 없다(그리고 짐작컨대 당신은 스링거 벨도 마찬가지로 돈에 관심이 없다고, 그리고 어쩌면 더 나아가 금융자본 그 자체의 관심사도 실제로는 돈과 그것이 과거에 의미했던 부와 풍요에 관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다). 프랭크는 볼티모어 항구의 재건과 재활성화를 위한 보다 상위의 기획을 위해 사람들과 접촉하는 데 돈을 사용한다. 그는 역사를 이해하며 노동운동 및 그 주위에 형성된 전체사회가 항구가 되돌아오지 않으면 지속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거기서 그의 유토피아적 기획, 실현될 수 없고 가능하지도 않다는―역사는 결코 이러한 방식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그 전형적인 의미에서 유토피아적이며 실제로 그와 그 가족을 결국 파괴시키는 공상적인 꿈이 등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를 넘어서 이러한 확장된 유토피아주의의 개념이 플롯구성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리얼리즘은 얼마간 항상 필요한 것이었다. 가령 왜 일이 그렇게 되었으며 왜 현실 그 자체는 불가항력인 동시에 옮길 수 없는 장애물인지 말이다. 프랭크의 허황된 꿈을 순수하게 리얼리즘적인 작업에 포함시킨다면 우리는 그것을 (발자크가 자주 그랬듯이) 광증으로, 심리적 강박으로, 순수한 주관적 충동과 성격상의 특이함으로 보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의 꿈은 그와 같지 않다. 그것은 객관적일뿐만 아니라, 만일 와이어의 플롯이 그 성공을 보여주었다면, 그 모든 객관성들을 그 자체 안으로 불러 모으는데 이로써 재현은 사회 자체의 유토피아적인 (혹은 혁명적인) 변화와 재구축을 함축하게 된다. 그것은 더 와이어의 작가나 제작자들이 고안하고 시청자들에 의해 바람직한 정치적 사회적 개선으로 인정받은 정치적 탄원이나 정치적 프로그램이 아니다―아무도 이 에피소드를 그런 식으로 이해하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개인적인 변화보다는 오히려 집합적이고 역사적인 역전을 포함하기 때문이다. 프랭크의 꿈은 그렇다기보다는 더 와이어와 그것의 균일한 리얼리즘 혹은 현실성에 미세한 균열과 틈새를 도입한다. 이 에피소드는 따라서 다른 대부분의 대중문화 서사에서 발견될 수 없는 무언가를 더 와이어에 추가한다. 픽션이긴 하지만 여전히 완전히 현실적인 사건들의 구성 속에 아무런 환상이나 소원성취도 포함되지 않은 유토피아적 요소가 도입된 플롯 말이다.

 

하지만 사봇카의 유토피아주의가 더 와이어의 이어지는 시즌들에서 그 등가물을 지니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순한 요행수 혹은 별난 것으로 남았을 것이다. (우리는 지역에 대한 자부심 속에서 이 소란을 만든 이들이 단순히 순수하게 자기 지역에 관해 말하기 위해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을 봄으로써 그것을 평가절하할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유토피아주의는 등가물을 가지는데 여기서 나는 나중에 이어지는 시즌들에서 유토피아적 차원을 지닌 사건들을 단지 열거하기만 하겠다. 시즌3에서 유토피아주의는 명백히 콜빈 경감의 마약 “합법화”에서 제시되는데 거기서 그는 경찰의 개입으로부터 차단된 마약지대를 창조한다. 시즌 4는 교육을 다루는데 연방과 주의 정치제도가 강제하는 시험평가 제도를 거부하고 컴퓨터를 교육에 이용하는 프리즈발루스키의 교육실험에서 유토피아적 요소가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가장 문제적인 시즌5에서 유토피아적 요소는 관료제와 그 예산 외부에서 진지하고 진정한 경찰작전에 돈을 댈 비밀스러운 자금출처에 관한 지미의 창안에 있다. 비록 지미가 인위적으로 조장하고 어떤 점에서는 신문과 미디어(더 와이어의 개별 시즌은 에밀 졸라의 위대한 연작들이나 사라 패레츠키의 시카고 범죄소설처럼 특정한 산업 주위에 조직되어 있다)에 의해 조종된 일련의 범죄공포에 불구하고 말이다.

 

미래 그리고 미래의 역사는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양자의 서사에서 디스토피아 SF와 재난서사라는 형식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더 와이어에서만큼은 예외적으로 유토피아적 미래가 현실과 현재가 그것을 닫기 전에 여기저기서 불쑥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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