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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문화의 연관성

디자인과 문화의 연관성

1.총 론
우리는 흔히 어떻한 사물을 보면서, 다른 세대, 다른 지역의 사람들과 함께 공통적으로 공감하는 것이 있고, 또한 그렇지 못한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카이 홀맨의 광고를 보며 기성세대들은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왜 저런식의 광고가 나왔는지 알수 없어 한다. 하지만, 카이 홀맨이 ‘왕따’가 사회적 이슈가 되기도 전에, 피부로 느끼고 경험해 본 신세대들은 쉽게 그 광고에 공감하고 납득해 한다.
또 미국의 수퍼마켓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일회용 제품들이 유럽의 문화권에서 완전히 수용되니 않고 있으며, 오히려 일회용 물건을 쓰는 것을 배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개발된 김치 냉장고를 다른 나라에선 시큰둥한 반면, 우리나라에선 거의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과거 한 외국인이 우리나라 할머니들이 쓰는 요강을 보고 사탕 바구니인줄 알고 구입했다던가 하는 우스꽝스러운 일화를 들지 않더라도, 우리는 쉽게 다른 문화권의 사람들과는 통하지 않는, 즉 무엇인가 구분되는 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한 나라의 문화는 그 지역의 특성을 규정지으며, 다른 문화권과의 차별성을 가지게 된다. 이것은 지역적인 차이일수도 있고 시대적인 차이에서 오는 것일수도 있으며, 둘다 상행하여 오는 차이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이 이러한 차이들이 단순히 사람들의 의식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모든 것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디자인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디자인은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나 관념, 필요성에 의해 변화하고 맞추어진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그 문화에 영향을 가장 많이 받는 분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흔히 프랑스 디자인이다, 이탈리아 디자인이다 하는 식의 구분은 같은 유럽에서도 다양한 이념과 그를 토대로 한 문화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것들이 디자인에 적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디자인은 문화의 영향 안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특정한 디자인 트랜드가 생가났거나, 그것이 성행할 경우 그것은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든가, 사회적인 이슈, 혹은 특정한 사건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에 기반하여 만들어 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우리는 지난 역사에서 발견되는 디자인의 역사가 어떻한 문화적인 특성을 가졌기 때문에 생겨났는지를 알수 있고, 이러한 사실들에 기반하여 앞으로 어떻한 문화로 인해 어떤식의 디자인 트랜드가 생겨날 것인지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한 미래 디자인의 예측에 앞서 우리는 디자인과 문화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고, 그 둘의 연관성을 분명히 파악해야 할 것이다.
Ⅱ . 서론
그 동안 우리 사회에서 디자인은 60년대 초 시작된 일련의 경제 개발 계획과 더불어 기껏해야 산업 경제 활성화의 ‘수단’정도로 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많은 디자이너들은 디자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술개발에 투자하는 막대한 비용에 비해 디자인으로 승부하면 적은 비용으로 제품의 차별화가 가능하고 생산 단가를 결정적으로 낮추어주며, 효과를 극대화 시킬수 있는 고부가가치 산업” 이라는 말을 했었다. 이와같은 경제적인 효용성에 힘입어 우리 사회에서 디자인 산업이 갖는 중요성과 그 개발의 절실함에 대해서는 서서히 공감대가 형성되어 왔다. 정부나 하계, 언론계 모두 디자인 육성에 집중적인 관심을 보이면서 관련 인력이나 조직, 제도, 정부, 일반인의 인식 제고 등의 측변에서 괄목할 만한 진전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산업 전략은 그 동안 디자인을 단시 일부 산업이나 제품에만 적용되며, 단지 기계적인 상품의 보완에만 신경을 썼을뿐 그 시대의 문화를 대변하고, 문화를 담아내는 데는 소홀히 해 왔었다. 만일 현대 사회에서 디자인의 역할이 중요한 것으로 간주된다면, 디자인의 이해는 산업 전략이기 전에 그것이 지닌 문화적 의미와 역할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달리 말해 디자인은 물질적으로 경제를 풍요롭게 해 주는 하나의 수단이라는 개념보다 과연 우리가 사물과 이미지를 통해 어떤 방식의 삶을 원하는지를 해석해내고 창조해내는 데 관여하는 중요한 문화적 행위라는 것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먼저 “삶에 대한 철학적 인식”이 전제되어야 한다.
디자인은 어떤 방식으로 우리의 삶에 변화를 주며, 사람들은 디자인된 공간, 사물, 이미지를 통해 어떻게 인식하며 살아가는가? 왜 디자인은 매 시대마다 그것을 대표하는 모습으로 변화해 나가는가? 왜 어떤 시대에서는 선호되었던 디자인이 다른 시대에서는 경시되는가? 즉, 왜 디자인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변화하는 것인가? 이렇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하나 하나 찾아가다 보면 우리는 하나의 결론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즉, 디자인은 한마디로 그 자체가 ‘문화 현상’인 것이다. 문화란 피상적이거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피부에 생생하게 와 닿는 것이면서 유기체처럼 고정된 형태 없이 변화하고 움직이는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흐름과 같은 문화 속에서 수많은 장소, 사물과 이미지는 우리의 정서를 일깨우며 자극하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우리가 어떤 종류의 인간인지, 우리가 속한 또는 속하고자 하는 집단에 대한, 특정 시대와 공간에서 부여된 기대치와 기준에 관한 수많은 문화적 정보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동안 단지 소비자 상품과 이미지 생산의 주체로 한정되어 ‘도구적 차원’에서 편협하게 정의되어 온 디자인은 앞으로 우리 자신과 공동체적 삶 모두에 대한 핵심적인 ‘문화적 행위’로 간주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디자이인의 어원과 문화의 정확한 뜻, 그리고 이 둘의 상관성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Ⅲ. 디자인이란 ?
디자인이란, 크게 두 가지 어원적 유래를 지니고 있다. 첫 번째 어원은 15~16세기 불어의 ‘데쌩, desseing’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라틴어 ‘디세뇨,desegno’로서, 이 두 단어의 뜻은’ 계획, 의도, 목적, 모델, 그림’을 의미했으며, 오늘날 이 용어는 보다 전문적으로 ‘미술의 계획’을 의미하는 ‘dessin’이라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회화에서 밑그림을 의미했던 디자인의 라틴 어원 ‘디세뇨’는 점차 ‘예술가의 마음속에 작용하는 창조적 사고’를 암시하는 말로 확장되었다. 이러한 데쌩과 디세뇨에서 유래한 디자인의 의미는 원래 ‘마음의 계획’이었던 것이다. 따라서 사전적으로 디자인의 현대적인 의미는 ‘마음에서 인식되고 후속적인 실행을 위한 의도된 계획 또는 목적에 대한 수단의 채택’을 의미한다.
그 동안 디자인은 바로 이러한 어원적 의미에 기반하여 정의되어 왔다. 예를 들어 디자인 실무와 이론에 영행을 끼쳤던 다음과 같은 정의는 이 점을 잘 말해 준다. “일종의 목적 지향적인 문제 해결 활동”, “이전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롭고 유용한 것을 파생시키기 위한 창조 활동”, “일련의 특별한 상황에서 진정한 필요성의 핵심에 도달하기 위한 적절한 해결 방법”… 이들 모두의 견해는 디자인이 인간의 특정 목적을 위해 무언가를 ‘계획하는 활동’이라는 점을 공통적으로 말해 주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목적하는 활동이 무엇이냐에 따라 수많은 영역에서 채택될 수 있는 단지 ‘도구적 수단’의 의미밖에는 갖지 못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디자인이란 단어의 수많은 용례에 직면했을 때 우리가 갖는 당혹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공학적 목적으로 채택된 디자인은 단지 ‘기계 설계’만을 의미할 것이며, 기업 경영의 측면에서 디자인이 사용될 때는 ‘경영 합리화를 위한 계획”을 의미하고, 미술제작의 목적에서 디자인은 단지 ‘작품의 사전 구상’ 정도의 의미로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디자인의 정의들이 간과해 온 중요한 사실은, 디자인이란 말이 라틴 어원의 ‘데시그나레.designare’ 에서 유래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디자인의 또 다른 어원으로서, ‘데시그나레’는 ‘지시하다 또는 의미하다’를 뜻하는 말로 이것의 어원적 구조는 ‘~을 분리하다, 취하다’를 뜻하는 ‘de’와 기호 또는 상징의 ‘signare’와 결합되어 ‘기존의 기호로부터 분리시켜 새로운 기호를 지시하다’를 의미하게 된다. 이 어원으로 볼 때 디자인의 의미는 한마디로 ‘이미 존재하는 기호를 해석해서 새로운 기호를 창조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별로 언급되지 않았던 이 의미가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이것이 디자인과 인간 삶 사이의 관계 방식을 설명해 주는 중요한 어원적 단서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즉, 이 어원에서 기반하여 디자인의 의미는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다.

” de + sign =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 “

인공물은 꼭 있어야 할 상황에서 존재하는 자연물과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필요와 관심에 따라 인위적으로 설정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인간은 인공물을 통해 자신의 삶을 정의해 왔던 것이다. 즉 우리는 모든 고고-인류학적 자취들에서, 문자로 기록되는 문명 시대 이전부터 인간이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간에 삶의 방식을 도구적 인공물을 통해 표현해 왔음을 볼수 있다. 예를 들면 인간은 원시시대부터 필요에 의해 도끼를 만들고 토기를 제작하였으며, 자신들의 염원을 담아 벽화를 그리고, 문명을 발달시켜 온 것이다. 사이몬[H.Simon]이 그의 저서 [인공물의 과학]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자연계보다 훨씬 더 인위적이거나 인공적인 세계에서 살고 있으며, 환경의 거의 모든 요소들이 인공물의 증거를 뚜렷이 보여 주고 있다. 흔히 고고-인류학자들은 이러한 인공물이 특정 시대, 특정 인간들의 삶의 수단일 뿐만 아니라 언어와 동일한 기능을 하고 있음을 말해 준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사고를 전달하듯이, 인공물을 통해 삶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떠한 인공물을 만들고 디자인 한다는 것은 단순히 필요에 의해서 만들고 사용에 편리하도록 제작하며 보기에도 좋은 물건을 만들어 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는 ‘이런 물건을 가지고 살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이런식으로 살아가고 싶다, 혹은 우리는 이렇게 살아가자’ 라는 은연중의 바램이나 약속을 표현해 내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은 이렇한 약속들이 혼자만의 생각에 의해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보편화된 특성, 혹은 이념들이 섞여 만들어 진다는 것이다.
즉, 디자인이 문화를 반영할수 박에 없는 것은, 디자인 안에는 이러한 사람들의 바램들을 형상화 시키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상관없이 즉각적으로 어떤 특정 문화를 대변하는 상징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지난 1994년 11월 29일, 우리는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기 위해 ‘타임 캡슐’을 남산에 묻은 적이 있다. 앞으로 400년 후인 2394년 후손들에 의해 개봉될 이 속에는 우리의 삶의 양식을 대표하는 물건 71점과 함께 사회 제도 205점, 환경 관련 70점, 생산물 78점, 가치 체계 52점 등이 담겨졌다. 이 모두는 우리 시대를 대표하는 상징물들로서 우리의 일상 삶 속에 담겨진 문화적 현실과 수많은 의미들을 후대에 전해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이 시대를 떠난 뒤, 후대 사람들은 타입 캡슐을 통해 우리 시대를 우리가 살다간 문화의 모습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러한 것을 이해한다면, 디자인은 단순히 산업적 수단이 아닌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디자인은 바로 우리의 일상 삶 자체를 담아내고 그 자체가 궁극적으로 문화를 형성시키고 기록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난다 해도, 우리가 남긴 건축물, 생활 용품, 그래픽, 광고와 옷 등은 우리가 어떠한 생각과 모습으로 살았는지를 후대에 전해 줄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문화를 인간들 사이에 만들어지는 약속이나 생활 방식이 형성된 인공 환경이자 일상 삶을 표현하고 만들어내는 사고와 홀동 모두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면, 디자인이 그때 그때 즉각적으로 삶의 방식을 드러내고 그것을 구체화시켜 사회외 보편적으로 소통시키는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에 깊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 삶 속의 디자인 ※
만일 디자인을 문화적 상징의 해석과 창조에 관여하는 활동이라고 전제한다면, 디자인이 관여하는 일상 삶은 무엇보다도 유기적 연속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상 삶이 만들어내는 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생성되는 일종의 흐름과도 같은 것이다. 우리의 삶은 결코 닫혀진 ‘존재 양식’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상 삶에 대한 이해는 그것이 언제나 변함없이 정적인 구조로 존재한다고 파악하는 서구 철학의 ‘존재의 형이상학’과 같은 결정론적인 관점에서 쉽게 유형화되거나 분석될 수 있는 대상의 범위를 넘어선 초 개념이자 초대상적인 것임이 전제되어야 한다. 즉 디자인과 같은 실천 영역이건 사회 문화 이론이건 간에 일상 삶을 고정된 시각에서 파악하려는 모든 시도들이 사실상 흐르는 물을 그릇에 담아 이미 흐름이 아닌 죽어버린 것을 다루는 일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일상 삶에 대한 잘못된 이해로부터 기인한 디자인의 예들을 수없이 찾아볼수 있다. 도시 개발과 건축에서부터 사소한 TV리모콘에 이르기 까지 삶의 의미와 생명력을 차단하는 수많은 디자인의 예들이 있다. 자주 지적되는 고층 아파트로 이루어진 신도시 계획에서 드러난 많은 부작용들은 개발의 명목 아래 삶을 지나치게 기능적인 변수들만으로 유형화시킨 데서 비롯된다. 계획 과정에서 도심과 통하는 교통망에서부터 일상의 여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통제된 변수들의 유형으로 분류하고 분석함으로써 대부분의 비인간적인 인간 행동 양식들은 배제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남에 따라 신도시 거주자들은 불만을 표출하게 되는데, 이는 개발 과정에서 간과되었던 비인과적 행동 양식에서 기인한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TV또는 오디오 리모콘에 부착된 수많은 버튼들은 수십 개의 동일 형태의 버튼들로 이루어져, 깨알같이 작은 지시 문자를 식별하지 않고는 원하는 기능에 접근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동일 형태의 버튼에 담겨 있는 수많은 기능들, 예를 들면 비디오 프로그램 예약 녹화에서부터 TV에 내장된 날짜 및 요일 맞추기 등은 어느 정도의 전문적인 교육 수준과 기술을 요구한다. 제품 자체의 뛰어난 기능에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무능력은, 소비자의 무지의 탓인가 아니면 디자이너의 오만함 탓인가? 이는 우리의 일상적인 인지 반응의 한계를 넘어서 인간 행동을 기능적 변수들의 조합으로 단순하게 이해함으로써 마침내는 사람과 인공물 사이의 소통의 맥을 차단시킨 예라고 할수 있다.
이와 같이 도식화된 삶의 유형화가 만들어낸 불만과 소통 장애에 대해 우리는 새로운 인공 환경과 사물에 적응하고 인내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하고 있는 예들을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획일적인 아파트 구조에 대해, 적극적으로는 구조벽을 헐어내고 주어진 공간을 변경시키고 , 소극적으로는 커튼과 벽지 선택 등을 통해 주어진 공간을 각자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재구성하는 추가적 행동을 한다. 리모콘의 경우 작동의 양상이 복잡할 경우 사용자는 자신이 아는 작동방식만을 사용함으로써 리모콘이 담고 있는 나머지 기능들을 포기하게 된다. 또한 자동차가 일상 삶의 영역에서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사람들이 무감각한 사물에 어떻게 스스로 적응하고 있는지 잘 말해 준다. 자동차에 부착된 각종 스티커, 자의적으로 교체된 알루미늄 휠과 광폭 타이어, 차내의 가지각색 방향제와 금박 장식의 휴지통등… 이 같이 디자이너들이 경멸하는 모습들 속에는, 단지 잘못된 속물들의 저질 취향만으로 간주될 수 없는 그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이런 예들은 획일화되고 무감각한 사물에 대해 소비자들이 자신의 삶을 확보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에 대한 소비자들의 ‘개입현상’은 소비자의 ‘저질 취향의 탓’으로 무조건 간과하기에는 일상 삶에 대한 섬세하지 못한 배려와 무지의 소산이라 훌 수 있다. 역사를 통해 한 문화를 이루는 내용은 바로 구체적인 일상 삶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그리고 그 문화의 내용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동과 실천의 연결망으로 이루어져 왔기 때문에, 이러한 일상 삶이라는 현상에 더욱 구체적으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실제 ‘행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상식적 의미’에 기반하고 있다. 경험과 행위의 의미 수성에 대한 매우 섬세하고 설득력 있 형상학적 분석을 한 슈츠와 럭크만은 이간은 매일 살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행동해야 하는데, 바로 이러한 행위의 연속이 평범한 일상의 인간 생활의 근간임을 주장했다. 즉, 인간의 행동은 개인 또는 집단에게 부여되는 정치 경제적인 사회 지배력의 정도와는 상관없이 ‘통상적인 의미’에 의해 매일 재구성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가 삶에 관여하는 일상적 행동은 지역구 국회의원을 뽑는 정치적 입장의 선택과 같은 의식적인 행위 에서부터 찻잔을 쥐는 자세, 담배 무는 입놀림, 차의 시동을 rjfrlRK지의 습관적인 몸놀림, 대화중의 말투, 등과 같이 거의 무의식적인 행위에 갖가지 차원의 행동들을 포함한다. 삶이란 바로 이와 같은 관습적 행동이 만들어 내는 ‘실천 양식’을 뜻한다. 이는 일상적인 ‘개념’이 아닌, 구체적인 삶의 세계 속에서의 자아, 즉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종합적인 ‘생활 감각’을 반영하기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적인 실제 행동이야말로 우리가 참여하는 삶의 상태가 어떠한지를 말해 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공물에 대한 반응으로서 인간 행동뿐만 아니라 행동에 미치는 인공물의 영향은 일상 삶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생생한 반응점’인 것이다.
이러한 개인과 집단 내부에 가려져 있는 일상 삶의 무수한 의미들의 상호 작용은 바로 우리가 디자인한 인공물 속에 담겨져 한 사회의 문화를 형성하고 그 문화를 파악하게 하는 경혈점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디자인은 일상 삶의 의미와 실천 방식을 드러내는 생생한 ‘문화적 반응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디자인이 기반했던 사회 개발의 모델과 기능이 구체적인 현실로 일상 삶의 의미를 충분히 조명하지 못하고 부분적인 삶의 모습만을 강조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는 사회 내의 물질적 조건을 제공하는 기본적 차원에서 디자인을 인식할 뿐 디자인이 어떤 삶의 모습을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한 것은 아닌가? 또한 현재 디자인을 주도하고 있는 실행의 주체들은 지나치게 기술과 경제 논리에 근거해 극히 부분적인 문화 지형만을 그려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Ⅳ. 문화란 ?
그렇다면 문화란 대체 무엇일까?
문화는 크게 묘사적, 역사적, 규범적, 심리학적, 구조적, 발생학적 정의에 등 여섯 가지의 주된 유형을 포함한다. 각 유형들이 지니는 핵심적인 내용만을 요약해서 다루자면
우선 문화의 정의에는 묘사적 정의가 있는데, 문화가 담고자 하는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하면서 성격을 강조하는, 주로 타일러식 정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찍이 타일러는 문화를 “지식, 믿음, 예술, 법, 도덕, 관습과 사회의 일원으로서 얻은 습관과 다른 능력들을 포함한 복잡한 전체”라고 정의했다. 이러한 유형의 정의들은 다소 차이가 있지만 대개 복잡한 전체로서의 관습, 관습에 의해 결정된 개별적인 행위와 산물들을 나열해서 정의하려는 특징을 지닌다. 예를 들면 문화란 “모든 인간의 행동, 습관, 믿음의 총합이면서, 인간의 생산물과 행동, 사회적 조욕적 질서와 같이 소위 우리가 문명이라고 말해 왔던 관습과 믿음의 총체”라는 것이다.
두 번째 역사적 정의는 사회적 유산과 전통을 강조하는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회적 유산의 조직과 총합인 어떤 집단의 문화는 인종적인 기질과 그 집단의 역사적 삶 때문에 사회적 의미를 획득했다”는 것이다. 사회적 유산은 흔히 역사적으로 계승된 인공물, 상품, 기술적 과정, 사상, 습관과 가치로 구성된다. 이는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지속적으로 학습되고 소통된 것이기 때문에 집단들 사이의 차이점을 만들어낸다. 따라서 “문화는 단지 하나의 고정된 상황이나 상태가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으로서 과거를 보본하고 현재에 작용하고 미래를 형성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 번째, 규범적 정의의 유형들은 ‘삶의 양식’과 같은 규범 또는 방식을 강조한다.
이에 따르면 문화는 “한 종족에 의해 표준화된 절차와 믿음의 집합체” 또는 “공통된 지형적 영역에 거주하는 인간 집단이 사물, 재료적 도구와 가치, 그리고 상징에 관해 느끼고 사고하는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절차, 믿음, 사고의 방식은 실천적 의미에서 ‘사회적 행동 양식’을 수반하기 때문에 문화는 달리 표현해 ‘삶의 방식’을 의미하기도 한다. 따라서 문화는 ‘모든 인간 집단에서 관찰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 불리는 행동양식’을 지칭하며 “다른 모든 것으로부터 구별되는 어떤 사회의 특별한 행동 양식”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러한 규범적 정의에 해당하는 문화의 정의는 공통적 혹은 공유된 형식, 규칙을 따르는 데 실패한 것에 대한 제재, 어떻게 처신하고 행동하는지에 대한 자세 및 행동을 지시하는 사회적 규범을 포함한다.
네 번째, 심리학적 정의들은 흔히 문제 해결의 도구로서 인간의 적응, 조절과 학습을 강조한다. 즉 “문화는 주어진 시기에 사람들이 달성하려 하는 목표에 사용된 테크닉, 기계. 정신, 도덕의 총체적 능력이며, 개인적 또는 사회적 목표를 증진시키는 수단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이는 문화가 삶의 조건에 인간이 적응하기 위한 모든 것을 지칭하는 것으로 변화와 선택과 전달을 통해서만이 획득되는 것임을 말해 준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자체의 작동에 의해 역동적이며, 인위적인 질서와 패턴을 파생기키는 영속적인 속성을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역동적이고 영속적인 속성은 학습 과정 없이는 절대로 유지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의 모든 사회적 행위는 유전세포에 의해 날 때부터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각각의 새로운 세대에 의해 성인들로부터 새롭게 학습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유형의 정의들에 따르면 문화란 생물학적 유전의 결과가 아니라 사회 구성원에게 특징지어진 학습된 행동 양식의 총합이라는 것이다.
다섯 번째, 구조적 정의의 유형은 문화를 사회적 조직체 또는 제도로서 강조하는 정의들로서, 흔히 문화란 “한 사회 집단으로부터 추출된 상호 연관된 관습”에 적용된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상호 연관된 관습들은 다양한 관계를 통해 체계 속에서 통합되어 궁극적으로는 문화라는 일종의 ‘제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제도로서의 문화는 제각기 다른 사회의 독특한 패턴을 형성하기 위해 상호 연결된 것”임을 말해 준다. 대부분 이러한 정의들은 인간 행동 자체보다는 그것이 기초하고 있는 구조적 체계를 강조하는데, 말하자면 문화란 삶 자체가 아니라 ‘삶을 계획하는 체계’라는 점을 강조한다. 이로 인해 문화는 구조적 관계 내의 요소, 혹은 부분들보다는 각 부분들 사아의 상호 설정된 관계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으로 정의되는 경향을 지닌다.
여섯 번째, 발생학적 유형의 정의들은 주로 문화를 만들고 존재하게 하는 근원적인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점에서는 적어도 세 가지의 다소 다른 견해들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는 ‘인공물 혹은 산물’로서 문화를 강조하는 정의들이 있고, 두 번째는 외부적인 물질 세계를 강조하기보다는 정신 세계로서 ‘사고’를 강조하는 정의들과, 세 번째는 ‘상징 또는 상징화 과정’을 강조하는 정의들이 있다. ‘인공물 또는 산물’로서의 문화 정의는 “인간이 자신을 창조하고 적응해야만 하는 환경의 일부”로서 다음 세대로 전해지는 삶의 습관과 도구의 산물”임을 제시한다. 달리 말해 동물의 삶과는 구별되는 것으로서 인간 문화는 물질적이고 비물직적인 산물들을 포함한 도구, 상징, 조직, 공통된 활동, 태도 , 믿음과 같은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문화라는 것이 인간 경험의 조직이자 “사회적 삶의 침전물”임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러한 정의들이 포함하고 있는 ‘물질문화’에 대한 집중적인 강조는 인공물 이면에 담겨진 사고에 주목하고자 하는 다른 정의들에 의해 반박된다. 이러한 견해는 단지 조직된 침전물로서 물질적 요소가 문화 자체는 아니며, 이것들은 단지 인간 사고가 외부적으로 표출시킨 시각적 표시에 불과한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즉 “문화가 사회적 구조이자 조직이라면 사고는 문화의 세포”라는 것이다. 결국 문화는 복잡한 사고의 결합이지 구조 자체는 아니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문화를 산물로 보는 견해와 사고로 보는 견해가 대립하는 가운데 ‘상징’으로 문화를 해석하는 제 3의 발생학적 정의가 있어 앞의 두 견해를 중재한다. 이 견해는 문화를 “상징”에 의해 중재되는 모든 행위”로 정의하고 있는데 “모든 문화적 범위, 사회 질서와 현상은 바로 상징을 사용하는 인간 능력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외부적으로 표명된 모든 기구와 도구 같은 물질적 사물, 행동, 믿음, 태도 등은 의식적 상징화 과정에 의해 형성된 의미 체계라는 점에서 이 정의는 앞서 말한 사고로서의 발생학적 문화 개념과도 연결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위에 제시한 정의의 유형들에서 제시된 문화의 정의들은 다음과 같은 성격으로 요약될 수 있다.
1) 문화는 사회적 유산과 전통에 의해 형성된 사회적 의미체계로서,
학습과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지속되고,
2) 특정 시공간 내의 사회적 행동 양식에 의한 삶의 방식이며
3) 변화하는 삶의 조건에 적응하기 위한 선택적이고 역동적인 조절 과정으로
4) 사회적 제도의 상호 연결 체계로서 삶을 계획하고,
5) 상징화라는 의식적인 인간 사고에 의해 형성된
모든 의미있는 인공적 산물의 표현인 것이다.

Ⅴ. 디자인의 문화 개념
오늘날 논의도고 있는 문화의 개념은, 위에 요약한 내용들이 각기 다른 관점에서 부분적으로 제시되었던 것과는 달리, 복선적이고 다원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위의 정의들이 단순히 문화의 기본적 요소와 발생적 근원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 반면, 최근의 다원적인 문화 개념들은 어떻한 가치와 의미들이 문화 형성에 작용하는지에 관심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견해는 레이몬드 윌리엄즈의 문화 연구로부터 얻어진 성과하고 할수 있다. 그는 문화를 “기술과 학습뿐만 아니라 제도와 일상적 행위에서 어떤 가치와 의미를 표현하는 특정한 삶의 방식”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윌리엄즈의 정의에서 문화는 특정한 삶의 방식으로서 문화 내에 드러난 또는 감추어진 의미와 가치들의 사이의 관계성에 대한 연구를 포함하고 있다. 윌리엄즈는 문화와 사회 사이의 관계성에 대해 보다 폭넒은 범주의 이해를 제안했는데, ‘특정 의미와 가치’를 분석하여 ‘일상 삶’이 표명된 모습 이면에 있는 ‘일반적인 원인’과 ‘사회적 경향’과 같은 역사의 숨겨진 원리들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문화에는 어떤 다른 기준이 존재한다는 편견이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전제했던 ‘전체적인 삶의 방식’을 설명하기에는 아직 한계가 있었다. 즉, 그는 새로운 대중 켜뮤니케이션에 시험적으로 찬동했지만 소위 ‘쓰레기같은것’과 ‘가치있는 것’을 구별하기 위한 미적이고 도덕적인 범주를 설정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에게 있어 문화는 어떤 ‘뛰어남의 기준’을 지닌 소위 순수 미술, 음악과 문학 같은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대중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지, 통속 소설, 자동차, 옷, 레코드판, 재즈와 같은 것들은 포함되지 않았다. 이것들은 모두 진정하지 못한 쓰레기와 같은 것들을 의미했던 것이다.
이렇게 가치있고 뛰어난 것으로만 제한된 문화 개념에서 ‘전적으로 자연적인’ 일상 삶의 잠복된 의미를 밝혀내려는 시도가 프랑스의 철학가, 롤랑 바르뜨에 의해 제안되었다. 바르뜨는 스위스 언어학자 소쉬르의 연구에서 유쾌한 기호학적 모델을 사용해 문화 현상의 임의적 성격을 드러내려고 했다. 그는 윌리엄즈와는 달리, 현대의 대향 문화에서 나쁜 것과 좋은 것을 구분하는 데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오늘날 부르조아 사회 내의 모든 즉흥적 형태들과 의례들이 어느 순간에 체계적으로 신화로 전환되는지를 밝히는데 관심을 두었다. 바르뜨의 문화에 대한 견해는 미술관, 도서관, 오페라 하우스를 넘어서 일상 삶의 전체를 포괄한다. 바르뜨는 ‘신화는 말하기의 일종’이라는 전제로부터 출발해 그의 저서 ‘신화론’에서 특정 사회 집단에 국한된 의미들이 사회 전체에 대하여 보편적인 의미로 제공될 때, 그 과정에서 숨겨진 법칙들 및 약호들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그는 레슬링 게임, 작가가 휴일을 보내는 태도, 여행자 책자들과 같은 서로 이질적인 현상들 속에 내재된 유사한 인위적 성격, 즉 이데올로기적인 표본들을 발견했다. 각기의 현상들은 동일하게 지배적인 상식(이데올로기)에 의해 사회의 ‘이차적인 기호체계’인 신화로 전환된 것임을 밝혀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언어학에 기초한 방법을 언어 외부의 다른 담론 체계들(패션, 영화, 음식 등)에 적용한 바르뜨의 방법은 오늘날 문화 연구에 있어 완전하게 다른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 그는 기호학적 분석을 통해 언어와 경험과 현실 사이의 보이지 않는 이음새가 위치되고 열릴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후기구조주의자로서, 바르뜨는 적어도 그 동안 문화 연구 분야에서 그토록 모호하게 가정했던 두 가지 갈등하는 문화 정의를 중재했다. 그는 “언론, 영화, 대화, 살인사건, 요리, 옷과 같은 일상 삶의 모든 것들은 부르조아들이 소유한 인간과 세계사이의 관계방식에 종속된다”는 마르크스주의적인 도덕적 확신과 대중적 주체의 결합을 시도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삶에 대한 연구를 시도했던 것이다. 그래서 종래의 단선적인 개념들이 ‘세상에서 최고라고 일컬어지고 판정하는’ 순수 미술, 음악과 문학 등과 같은 예술만을 문화에 포함시켰던 반면, 바르뜨의 개념은 ‘제도와 일상의 평범한 행동’을 포함하는 다원적인 문화개념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래서 문화는 특권화된 소수가 인간 경험의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 생산한 ‘최고의 것’이 아니라 판단하고 일상적인 경험에서 간주되는 모든 범위를 포함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다원적인 문화 개념에 기반한다면, 디자인이 창조하는 모든 인공적 환경과 이미지들은 분명히 문화적 현상을 고려된다. 문화가 특권화된 소수에 의해 인간 경험의 매우 제한된 영역에서 생산된 ‘최고의 것’만을 의미하지 않을 때, 디자인이야말로 현대적 삶에 있어 평범하고 일상적인 경험을 가능케 하는 문화적 산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디자인은 단지 산물의 의미를 넘어서 어떤 관계 방식을 만들어낸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윌리엄즈가 문화를 “어떤 의미와 가치를 표현하는 특정 삶의 방식”이라고 주장했을 때 그는 문화 개념에서 중요한 요소를 무시하고 있는 듯하다. 달리말해 그의 주장은 건축에서부터 입는옷, 생활 용품과 광고에 이르기까지 디자인이 단순히 사회적 산물이 아니라, 오히려 일상 삶 자체를 적극적으로 형성하는 작용태라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다. 사회 문화적 환경의 의미체계는 우리가 구성하는 디자인을 통해서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디자인은 ‘사회 질서를 커뮤니케이션하고, 재생산하고, 경험하고 탐색하는 의미 체계’로서 일상 삼의 중요한 실천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여기서 집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들이 있는데 과연 디자인의 문화적 실천과 의미 생산에 있어 힘의 위치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앞서 윌리엄즈가 말한 ‘의미와 가치를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디자인은 단지 이미 ‘저기에’존재하는 사회 질서를 표현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인가? 또는 바르뜨의 주장대로 디자인은 부르조아들이 소유한 인간과 세계사이의 관계 방식에 종속된 것인가? 우리는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 상품, 이데올로기와 헤게모니라는 몇가지 용어들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물질주의의 확산이 가져온 인간성 상실과 변질된 가치관을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면서도 자본주의 사회가 상품이라는 인공물 생산과 소비와 밀접하게 관계하고 유지된다는 사실은 당연시하는 이율배반적인 세계 속에 살고 있다. 어쨌든 오늘날과 같은 소위 후기 자본주의 사회는 상품이라는 물질적인 재화가 소비되는 과정을 통해 질서를 창조하고 유지해 나간다는 사실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이러한 차원에서 디자인은 상품 생산과 소비를 통해 ‘사회 질서를 커뮤니케이션하고, 재생산하고, 경험하고 탐색하는 의미 체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상품은 자체의 물질적 기능뿐만 아니라 의미와 가치를 지닌다.
예를 들면 원래 청바지와 같은 진의류는 저렴함과 편안함의 필요에 부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가난의 산물’ 이었다. 그러나 60년대 서구 젊은이들은 진의류를 일부러 ‘찟어서’입음으로써 자신들의 사회적 저항을 표시했고, 오늘날 진 제조업자들은 애초에 공장에서 기계적으로 ‘찢고 탈색시킨’ 남루한 진의류를 보급시켜서 저항 문화의 의미를 상품화시키고 있다. 또 다른 예로 최근 우리 주변에서 눈에 띄게 증가한 ‘흰색 자동차’에 대한 선호도는 사물에 대한 사회적 가치와 의미의 변화 과정을 잘 보여 준다. 관거 60~70년대를 통해 흰색 자동차는 기성 세대들에게 병원 구급차, 장의차와 경찰차를 연상시켰기 때문에 일반인들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80년대말 이후 경제가 성장하고 자동차 보급률이 높아지면서 마침내 흰색이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차량 색상으로 바뀌었고, 결국 흰색에 부여되었던 원래의 의미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각기의 상품은 문화적 가치와 의미를 지니며 한 문화가 선택할 수 있는 범주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상품을 디자인한다는 것은 결코 때묻지 않은 순순한 문화 활동이라고 할 수 없다. 문화 인류학자 더글라스 아이셔 두드가 ‘상품은 중립적이지만 그 사용은 사회적’이라고 말했듯이, 개별적인 상품 자체는 때묻지 않은 순수한 것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위치되는 사용의 국면에는 항상 어떤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의미가 작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중립적인 커뮤니케이션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 디자인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또는 공유해야 할 의식과 가치를 배양하고 라이프 스타일을 창조하고 유지하며, 자아를 구축하고 궁극적으로는 사회 변화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이데올로기적 속성을 지닌다. 앞서 말한 청바지와 흰색 자동차의 예는 단지 옷과 운송수단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말하기’ 방식을 취하는 이데올로기의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60년대 서구의 ‘찢어진 남루한’ 청바지는 저항 문화의 의미를 지녔으며, 80년대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한국 사회의 흰색 자동차의 선호도는 젊은이들이 기성 세대와 차별화하기 위한 정체성의 전략을 반영했던 것이다. 이것들은 모두 텔레비전 드라마, 대중가여, 소설, 영화 등과 같이 세상에 대한 특정 견해를 드러냄으로써 읽혀지는 문화적 텍스트들인 것이다. 이때 우리는 각기의 텍스트들이 지닌 문화적 또는 정치적 의도와 만나게 되는데 이에 관여하는 힘을 흔히 ‘이데올로기’ 라고 부른다. 한 문화 내에서 디자인에 관계하는 이데올로기는, 역사적 보존지역 내에 새로운 건물을 세울 것인가 말 것인가, 또는 어떤 건축적 형태가 그 지역에 합당한지를 경정하는 일에서부터 기업 이미지 통함 계획, 광고, 자동차, 생활 용품, 타이포그라피, 옷 등과 같은 상식적인 형태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언제나 일상의 의식과 사물들 속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경제적 생산 수단의 구성방식에 따라 그 사회가 만들어내는 문화의 형태가 결정적으로 영행을 받음을 만한 바 있다. 이른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의 기본 공식이 되었던 이 유명한 견해는 문화적 텍스트로서 상품이 사회 내의 경제적 ‘토대’에 의해 결정되는 상부 구조의 이데올로기적 표현 수단임을 만해준다. 마르크스가 말한 토대란 ‘생산력’과 ‘생산관계’로 이루어지는데, 생산력은 도구, 기술과 노동자 및 그 숙련도를 가리키고 생산 관계는 생산에 종사하는 이들의 계급 관계를 의미한다. 말하자면 각기의 생산 양식은 농업 또는 공업적 기반에 따른 특이한 생산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노예 제도는 주인/노예 관계를, 봉건 제도는 영주/농노 관계를, 그리고 자본주의는 부르조아/프롤레타리아 관계를 생산해낸다. 이런 점에서 사람의 계급적 지위는 생산 양식과 그 사람이 맺는 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상부 구조는 생산 양식의 기만에서 비롯된 ‘ 사회적 의식의 결정 형태들과 각종 제도들로 구성된다. 여기서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관계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상부 구조는 토대를 표현하는 동시에 정당화하고 다른 한편으로 토대가 상부 구조의 내용과 형식을 조건짓거나 결정짓는다는 것이다. 이 점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말을 인용해 보겠다.
모든 시대에 지배 계습의 생각은 지배적인 사고로 존재한다.
예를 들면 사회의 물질적 권력을 지배하는 계급이 동시에 지적 권력도 지배한다. 마음대로 물질적 생산 수단을 소유하는 계급어 동시에 지적 생산에 대한 통제력을 갖는다. 그래서 생산 수단을 결여한 사람들의 생각은 그것에 종속된다.
여기서 “지배하는 물질적 권력”이란 생산에 관련된 기술, 재료, 장비와 노동력을 통제하는 권력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러한 것들은 마음대로 소유하고 있는 계층은 마르크스가 ‘물질적’이라고 부른 사회와 경제뿐만 아니라 사고에서도 지배적일 것이며, 마찬가지로 ‘물질적 권력’을 소유하지 못한 계층은 사회, 경제와 사고 모두에서 종속적일 것이다. 따라서 자본주의 경제 구조에서 상품에 관여한 모든 이데올로기는 토대가 결정하는 상부 구조의 수동적인 반영일 뿐이라는 ‘기계적 경제 결정론’으로 규격되며, 상품과 같은 문화적 산물은 생산의 경제적 조건으로만 읽히거나 환원되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상품 이데올로기의 조건을 경제적 이윤을 추구하는 산업에 의해 생산된 것으로만 파악하려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는 모순을 지니게 된다. 왜냐하면 일단 생산되고 분배된 상품은 결코 그 자체로 존재하지 않으며 소비의 국면에서 일련의 선택과 저항이라는 ‘대중적 힘’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상품은 사람들의 관심을 담고 있어야 하며 그 관심은 결코 안정되고 고정된 것이 아니라 유동적이고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한다. 상품 이데올로기는 ‘살아 있는 사람들의 움직이는 관심’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그 시대의 문화, 이데올로기와 동떨어져 존재할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보자.
신은 인간을 창조하였다. 그러나 신은 인간이 필요한 모든 물건을 스스로 찾아 만드렁 사용하게 하였다. 인간이 원시 시대에 처음으로 만들었던 물건 중 하나는 아마도 도끼일 것이다. 인간은 도끼의 주재료인 돌은 자연에서 얻었으나, 이 돌을 날카롭게 갈아서 타격 효과를 높였으며 다루기 편하도록 나무 막대기를 돌에 묶어 사용하게 되었다. 이렇게 돌에 손잡이를 붙여 도끼를 만들었들 때 인간은 이미 도구의 실용성을 깨닫고 그것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초창기의 디자인은 아름다움보다는 기능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을 것이다. 즉,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만들려고 궁리하는 과정에서 디자인이 탄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가 차차 아름다움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아름다움이 디자인에서 또 하나의 경쟁력으로 자리잡게 되었을 것이다. 모든 디자인은 우선 재료와 새로운 기술의 개발에 의해 기능이 발전되는 단계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기술과 재료에 맞는 새로운 디자인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아마도 원시인이 생각을 하기 시작한 이후로는 태양이 또는 아침부터 태양이 지는 반복되는 하루 종일이 매우 지루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하루 종일 먹이나 찾아다니는 것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던 그들은 태양이 변함없이 내리쬐는 어느날, 그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뭔가를 손으로 갖고 놀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니 다른 원시인보다 더 좋은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 궁리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디자인으로 발전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또한 하루의 해가 지고 밤이 되면 야생동물이나 어둠의 공포로부터 안전하게 피하기 위해 동굴로 들어왔을 것이다. 매일 밤 같은 동굴 안의 벽만을 지루하게 바라보다가, 문득 손을 갖고 놀고 싶은 충동이 생겼을 지도 모른다. 밤의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벽에 그림을 그리게 되었고 이것이 원시 동굴 벽화의 기원이 되었을 것이다. 혹은, 원시 동굴 벽화는 단순히 장식용이 아니라 먹이감을 알리는 기능을 하였다는 해석을 하는 사람도 있다.
이렇게 원시의 디자인은 지루함 속에서 새로운 것에 대한 욕구를 달래기 위하여, 그리고 인간에게 편리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주기 위하여 시작되었다고 할수 있다. 가령, 돌과 나무는 신에 의해 창조된 재료이지만, 이 두개를 합쳐 만든 돌도끼는 최초의 원시인에게 가장 필요한 일상 용품이 되었다. 애초에 도끼는 먹이를 사냥하는 데 사용되었을 터이지만, 나중에는 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여러가지로 발전하게 되었다. 원시 시대의 도끼는 현대인의 숟가락이나 젓가락 만큼이나 일상생활에 없어서는 안 될 도구가 되었다. 도끼가 무기로 사용되면서 가장 크고 날카로운 도끼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는 힘센 원시인이 자연히 그 부족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동료 원시인들은 다른 원시인 집단이나 야생 동물로부터 보호함으로써 그 부족의 족장으로 인정받게 되었으면 당연히 도끼는 원시인에게 더욱 필수적인 물건이 되었고, 좀더 편리하고 강한 도끼를 만들기 위한 궁리가 생겨났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도끼의 디자인은 점차 강하면서도 가볍고 또 보기좋게 차별화되도록 변화되었을 것이며, 시간이 흐르면서 족장의 도끼를 만들어주는 전문 도끼 제작자가 생겼을 것이다. 도끼를 사용하기 편하도록 하려면 손잡이가 손에 잘 맞아야 한다. 여기서 제품 디자인의 전문 분야인 인간 공학이 출발했을 것이며, 나무의 굵기라든가 돌의 무게, 강도 등이 연구되어야 했을 것이다.
오늘날 도끼는 철과 같은 신재료 라든가 절단용 기계 같은 신기술의 등장으로 인해 그 본래의 기능을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으며, 우리의 생활 주변에서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이는 말이 운송 수단의 발달로 인해 점점 이용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 이다. 아파트를 주거지로 사요하기 이전만 하더라도 일반 가정집에는 일상적으로 도끼가 한 자루씩은 있었으나, 이제는 주변에서 도끼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도끼는 인간이 오랜 기간 동안 사용하여 온 도구였으나, 이제는 주변에서 도끼를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도끼는 인간이 오랜기간 동안 사용하여 온 도구였으나, 물질적, 환경적 여건이 바뀌면서 점차 사라지는 운명에 놓여 있다. 물론 어떤 도구는 재료가 바뀌면 형제도 함께 바뀌면서 계속 명맥을 유지하기도 한다. 가령, 망치는 전기 망치로, 톱은 전기 톱으로 전체적인 형체는 바뀌었지만, 본질적으로 망치의 때리는 부분과 톱의 톱니 모양은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도끼는 그 형체마저도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즉, 기능만을 우선으로 만들어진 도끼는 그 필요성이 사라지면서 디자인도 더 이상 발전하지 않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하나의 예로, 신발을 생각해 보자, 신발은 재료의 발달로 인해 디자인의 변화를 가장 많이 받았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짚신이나 나무 등의 재료를 사용하였지만, 이러한 재료를 사용할 때에는 그 모양이나 색상이 다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천이나 고무, 가죽 등을 섞어 사용하면서 부터는 신발의 디자인은 물론 색상도 다양해지게 되었다. EH한, 신발을 통해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가늠할 수도 있게 되었으며, 이제 신발은 단순히 발을 보호하기 위해 신는다는 개념에서 벗어나 용도나 패션에 따라 선별적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신발은 발을 보호한다는 기본적 기능만이 남아 있을 뿐, 아름다움의 기준이나 디자인은 완전히 바뀌었다. 죽, 디자인은 새로운 재료의 등장과 함께 그 형체, 기능, 패션이 끊임없이 변화하게 되었다.
그러나 원시 시대부터 지금까지 기능적 형체가 변화하지 않고 유지되는 물건도 있다. 그 대표적인 보기가 바로 바퀴이다. 일단 바퀴는 잘 굴러가야 한다는 기본적인 기능성은 원시 시대에서나 현대에서나 전혀 바뀌지 않고 있다. 더구나 잘 굴러가도록 사용되었던 원형은 다른 어떠한 형체로도 대치되지 않았다. 따라서, 바퀴의 재료가 돌이나 나무에서 철로 바뀌면서도 그 원형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이는 결국 지면에 닿는 부분이 원만하게 움직일 수 있는 형은 원형이 최선이라는 점을 증명하는 것이기도 하다. 바퀴의 원형은 수만년 동안 변화하지 않고 내려오다가, 마침내 현대 과학기술은 바퀴없이도 전진할 수 있는 자기 부상 열차를 발명하게 되었다. 이는 허공에 떠서 움직이는 비행기의 원리와 같다. 그러나 지면에서 움직이는 데 사용되는 원형은 운동 역학에 의해 다소 변화하였을지라도, 그 원래의 기본형은 현재까지도 변함이 없다.
이렇듯, 디자인이란, 그 시대의 기술력과 노하우, 시대가 요구하는 형태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것은 곧 디자인은 혼자 별도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와 쉽게 말하면, 우리가 사는 모습과 매우 밀접한 연관이 있다는 것이다.
개성과 자유가 중요시 되는 요즘의 의상이나 제품등의 대부분의 디자인 트랜드를 보면, 매우 다양한 형태가 서로 공존해 있다는 것을 알수 있다. 이것은 곧 각기 개개인을 중시하는 사회적 풍토와 자신만의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의지가 맞물려져 생겨나는 현상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항상 변화하는 사람들의 심리와 사회적 분위기를 표현하려는 사물에 담게 되고,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그 시대의 문화를 알수 있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디자인 역사를 살펴보아도, 독립적으로 전혀 뜻하지 않던 사조가 생겨난 적이 한번도 없었다. 항상 그 시대의 문화, 이슈를 반영하는 것이 디자인이이며, 같은 종류의 디자인이 그 시대의 주를 이룰때 우리는 이것을 문화사조 혹은 디자인 풍이라는 말을 써서 분류하고 연구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시대의 산물이기도 하지만 또한 디자인은 지역적인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 서양과 동양의 문화가 다르듯, 그 안에 존재하는 디자인의 모습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같은 동양권, 같은 서양권이라 해도 그 지역적 특성에 따라 이태리 디자인이니, 파리 디자인이니 하는식의 구분되는 트랜드가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곧 디자인이 그 시대의 문화뿐만이 아니라 지역적인 모습까지 담아내는 총체적인 활동이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에서, 혹은 지역에서 디자인은 어떻한 문화를 모습을 담고 있으며, 후세에 보여주려고 하는 것일까.

Ⅵ. 세기말 디자인의 모습과 영향
우선 19~20세기의 사회적인 모습으로 인해 디자인이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지부터 살펴보자.
지난 19세기 말의 상황에 기초하여 20세기 초에 설정된 모던 디자인은 소위 ‘기능적 순수함’이라는 기능주의 이념을 내세웠다. 이는 다가올 ‘기계 시대’를 위해 오직 과학과 기술의 도움으로 가장 진보된 형태의 새로운 디자인에 도달하기 위한 세계관이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념적 가설이 존재한다. 첫째, 일상 삶에서 학스보디는 다양한 경험이 집단적인 제어를 통해 단일하고 보편적인 삶의 형태로 취해질 수있다는 것이고, 둘WO로 사회 문화적으로 조건화된 혹은 주관적인 것을 배제하는 과정을 통해 객관적인 질서를 획득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문화의 주도적인 힘은 초기 이념을 구체적인 생산 방식에 적용하고 전세계에 전파시킴으로써 기능주의 모던 디자인의 이념을 확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모습은 전후의 세계 경제가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안정기에 접어들던 70년대 중반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70년대 말에 이르러 모던 디자인은 “위대한 성공을 거둔 시점”에서 최초로 비평을 받기 시작했다. 완벽한 획일성과 객관성이 모두 불가능한 가설에 불과했다는 회의론이 제기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떤 비평가는 ‘위기에 처한 기능주의’라는 글에서 “이 위기는 생산 제조업자와 소비자 욕구 사이의 갈등으로부터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모던 디자인이 일상 삶의 전체 영역을 간과하고 생산적 측변에서 사물의 기능적 효용성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던 부분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였다. 디자인에서 기능주의 모던 디자인의 원리는 단지 생산 제조업자의 경제성의 논리에 부합될 뿐 소비의 영역에서 인간들의 다양한 삶의 의미를 반영할 수 없었다. 자본주의 소비 사회에서 상품 소비로 인해 소비자의 욕구는 확대되는데 반해, 사물의 기능성은 언제나 불변의 법칙과 형태로 고정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정체 상태없이 시장 환경에서 확산되는 욕구의 상황에 직면하는가인데, 설사 소비자 욕구가 윤리적으로 사악한 종양과 같이 보인다 해도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욕구를 제거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엄밀히 말해 이러한 딜레마는 모던 디자인의 이념이 발아하던 시점에서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 애초에 ‘예술 민주화’라는 디자인의 공리적 이념의 목표는 개념적으로 사회주의 이상을 표명하면서도 자본주의 경제 체제하에서 실현될 수밖에 없었다. 이는 19세기 말 러스킨에 이은 모리스의 ‘미술 공예 운동’이 표명했던 낭만적 공산주의 사상이 고가의 수공예품을 만들어낸 자위 행위로 끝나버린 경우나, 20세기 모던 디자인의 주퓨를 형성시킨 바우하우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바우하우스가 내세웠던 사회주의 급진 개혁의 이념으로서 “새로운 삶의 스타일”은 그들이 경멸했던 소위 부르조아 물질 자본주의 사회의 경제 구조 속에서만 실현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바우하우스의 이념이 가시화되었던 것은 독일이 아니라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였다. 한마디로 모던 디자인의 이념적 기반은 애초에 소비 사회를 전제로 하지 않고 단지 생산의 원리에 기초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세기말 디자인’은 모던 디자인이 추구했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생산 원리보다는 소비와 대중 문화, 페미니즘, 컴퓨터화된 정보 사회에서 특정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반응으로서 ‘삶의 의미’를 더 중요한 원리로 간주하고 있다. 오늘날 미스 반데 로우에의 기념비적인 국제 양식 건축물의 은빛 표면은 스필버그의 ‘쥬라기 공원’을 상영하기 위한 은막으로 전락했고, 브라운사의 제품에 표현된 엄숙함은 알레시사의 “휘슬 주전자”의 휘파람 소리로 조롱당하였으며, 무표정한 제품의 표면은 멤피스의 낙서와 야한 색으로 뒤범벅되었다.
특히 80년대 초 일군의 산업디자이너들에 의해 구성된 이태리 멤피스그룹의 폭동은 모던 디자인에 가려져 있던 인간 삶의 사적인 의미를 재발견시켜 주었던 계기가 되었다. 딱딱하고 경직된 구조를 거부하고 원기 왕성한 무절제에서 오는 생동감과 사람을 놀라게끔 하는 기쁨의 솔직한 표현, 혹은 미래의 유토피아적인 상태에 대한 불신등 멤피스 그룹이 보여준 예측 불허의 모습은 현대 문명과 모던 디자인이 형성시킨 권력 구조에 대한 혹독한 비평이었던 것이다. 또한 멤피스 디자인 전체를 성격화하는 밝은 색과 밀집된 패턴들의 과잉적 모습들은 마치 어릿광대의 웃음 뒤에 남겨진 현대 문명의 어두운 모습을 비아냥거리는 듯했다. 이와 같이 디자인의 억제된 표현을 해방시키면서 일상적 삶의 은유를 디자인에 반영시키고자 한 디자이너들에게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뿌리에서부터 나온 영향력이 작용했다. 거기에는 다음과 같은 철학적, 문화적, 그리고 기술적인 패러다임의 변화된 모습들이 존재한다.
구조주의가 제공한 철학적 통찰은 세계에 대한 지각에 말과 시각 언어의 중요성을 인식시켰다. 디자이너들은 사물과 이미지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을 통해 언어가 문화 내에서 수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제품 또는 이미지의 선택이 창의적이고 표현적으로 시각적 의사 소통에 기여 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특히 80년대 중반 어떻게 디자인이 문화와 역사적 맥락 내에서 소통될 수 있는가에 대한 이슈들이 제품 의미론과 시각 기호론에서 논의되기 시작했다. 디자인은 이제 단순히 물리적 기능의 차원을 넘어서 상징적 의미에서 파생하는 심리적 기능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사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기호학적 이슈들은 마침내 디자이너들을 문화 내의 ‘기호 생산자’또는 인공물 문화의 주된 ‘해석가’가 되도록 이끌었다. 디자인에 이전에 볼수 없었던 과거, 혹은 추억에 대한 향수, 유머, 공상, 이중적인 암시와 같은 다양한 삶의 의미들이 새롭게 반영되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철학적 변화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나 의미의 전달체로서 디자인이라는 텍스트는 구조주의 기호학에서 파악했던 것보다 훨씬 더 위력적이며 단순히 으미론에 의해 제약될 수 없다고 회근 ‘후기 구조주의’ 철학으로부터 영향받은 해체 디자인은 제시한다. 죽 의미는 시각 언어를 통해 소통되는 상황에서,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는 다른 기타의 요소들과의 대조와 관계성이 만들어 내는 또다른 구조일 뿐 기호의 표상화에서 나타나는 일대일의 지시 대상적 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해체 디자인은 제품 형태와 구조의 해체, 광고와 시가 이미지에서 메시지의 부재 현상, 패션에서 속옷의 겉옷화와 의복 구조의 해체 등에 반영되고 있다.

◁케빈 클라인의 광고▷
캘빈 클라인의 의류 광고에서 캘빈 클라인의 속옷 패션은 겉옷과 중첩된 영역에 존재한다. 비밀스런 속옷을 밖으로 드러냄으로써 기존의 옷에 대한 안과 밖의 개념을 해체시킨다.
문화적 패러다임의 변화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마치 디자인이 종래의 유토피아로 향한 ‘진보’라는 개념을 포기한 듯한 모습을 취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물질 문명은 생태학적 위기에 처해 과거의 것을 재포착함으로써 진보에 대한 신뢰감을 포기한 것처럼 보인다. 초기 모던 디자인은 싱싱하고 강력한 괴팍함으로 가득 찼고 전후의 국제 양식에서 보여졌던 기능주의 디자인은 정제된 순수성에 도달했다. 그러나 최근의 디자인은 역사주의의 부활과 자기 복제적인 이미지를 차용하여 지나간 역사가 보여 준 모든 단면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과거 모던 디자인이 추구했던 역사로부터 단절된 “투명한 순수함”은 너무나 순수한 화학 ‘증류수’와 같아서 인간이 마시기에는 부적합했던 것이다. 또한 계속적인 경기 침체, 저하된 삶의 기준들, 증가하는 실업률, 에너지 고갈과 환경 오염 등의 문제에 대해 모던 디자인의 허위적 순수함과 간결함은 삶의 현실을 은폐하는 위선적 행위로 비춰졌다.
오늘날의 기술적 변화 역시 디자인의 모습을 변모시키고 있다. 미세 전자 공학의 발달과 그로 인한 ‘사이버스페이스’의 출현과 전자 제품의 소형화된 모든것의 사물이 지닌 기계적 구성 방식을 ‘비물질화’시켰다. 예컨대 과거 자전거와 같은 사물에서는 물리적 속성이 명확하게 기계적으로 드러났던 것과 달리 최근의 전자 제품에서는 작동의 방식이나 원리, 속성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또한 이전에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인공 지능이 전자 제품에 부여됨에 따라 디자이너들은 과거와 같이 단순히 기계류를 포장하기보다는 제품을 어떻게 사용자와 소통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이제 전자 시대 EH는 정보화 시대의 디자인 문제에서, 인간이 사물과 이미지에 반응하고 학습하는 인지적 과정이 중요한 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과거 모던 디자인의 사물 형태는 기껏해야 제품의 기능적 요구 조건을 충족시키고 난 뒤에 자동으로 남겨진 ‘잉여 가치 또는 찌꺼기’에 지나지 않았다. 말하자면 제품의 형태는 생산 단가의 경제성과 물리적인 기능의 최적화하는 견지에서 제품의 구조적 양상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제 사물의 형태는 단순히 거기 있다, 이렇한 모습이다라는 인지의 영역에서 벗어나, 점차 무엇을 하는 사물인지에 대한 존재성과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수행 능력’에 관한 의미를 소통시키는 ‘상징적이고 심리적인 기능’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기술 변화에 따른 인지적 문제와 함께 신 소재의 출현은 디자이너들이 생각해 왔던 기존 재료들에 대한 상식을 변화시키고 있다. 그동안 제품 디자인의 주된 원리는 재료의 본질을 파악해 그 속성에 맞추어 사물을 디자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새롭게 출현한 신소재들에서 재료의 순수한 본질을 파악하기간 사실상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무의미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금속의 성질과 유사한 인공 세라믹과 합성 수지, 돌의 견고성과 유리의 투명성을 지니니 새로운 플라스틱류, 광섬유 등과 같은 신소재의 출현은 사물의 형식성에 대한 종래의 관점을 수정하게 하고 있다. 이 모두는 새로운 생산 방법과 기술뿐만 아니라 제품 디자인의 기능과 형태 표현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최근 들어 환경 문제에 대한 관심과 함께 종래에 사용되었던 상품의 소재 선택에서도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이제 디자인은 무공해 또는 저공해, 재생 EH는 재사용 가능하고, 절약 가능하고, 미생물 분해 처리가 가능하고, 천연적이고, 환경상 안전하고 친숙하게 생산되어 궁극적으로는 인간 삶의 질을 고려하고 있는지에 응답해야 하는 친 환경적인 디자인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매체의 등장은 전통적 디자인 프로세스는 물론이요 결국은 디자인 스타일 자체를 변형시키고 있다. 컴퓨터의 등장은 단순한 수작업으로부터 디자이너를 해방시켜 주었고, 그 시간대에 대하여 디자이너는 질적인 부분에 투자할수 있는 자유를 얻었다. 이렇한 표현의 가능성에 대한 확장은 그 동안 추구되었던 모던 디자인의 스타일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단순한 형식성’이 낳은 결과이기도 하지만, 제작 방식에 의해 규정되었던 것임을 알게된다.
이상과 같은 세기말 디자인은 21세기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이를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디자인은 이성과 감성이 통합된 스타일을 반영할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60년대와 70년대의 모던 디자인은 주로 이성에 의한 분석적 사고에 기반했다. 그 결과 지난 80년대는 이성에 의해 억제되었던 상상력과 감성이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던 시기로 기록되었다. 거기에는 이성과 감성 사이에 쉽게 중재될 수 없었던 대결 양상이 뚜렷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 디자인에서 이성과 감성, 분석적 사고와 직관적 감수성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 관계로 삶 속에서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가능성이 목격되고 있다. 또한 고급스러움과 저속한 취양이 함께 존재하며 디자인의 목표는 보다 증가된 대중적 이해와 소비자의 다양한 선택권을 통해 삶의 의미를 형성시키려는 노력이 포함된다.
둘째, 인간 삶에 대한 디자인의 태도는 종래의 부분적이고 거창한 사회개발의 차원으로부터 일상 삶의 다양하고 작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모습으로 전환되어 지고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일상적 가치들은 제각기 따로 존재하지 않으며 마치 유기체의 흐름과 같이 유동적이고 연속적으로 퍼져 있다. 따라서 디자인은 과거와 같이 인산 삶을 결정론적인 관점에서 쉽게 유형화시키거나 조작적으로 분석할 수 없을 것이다.
셋째, 디자인은 다양한 문화적 뿌리와 유산을 강조함으로써, 사물과 이미지가 선택되고 소비될 문화적 기반의 필요성에 반응하게 된다. 지나간 국제 양식을 통해 보여졌던 세계적 보편성은 문화적 삶의 토대 위에서 재정의 될 것이다. 이는 세계적 보편성의 이면에 남겨진 지역적, 인종적, 문화적 차이에서 유래하는 삶에 질적인 차이점들을 조장하는 모습으로 비쳐질 것이다. 왜냐하면 유럽과 프랑스에 흔히 볼 수 있는 비네가 미국과 한국에서 아직도 쉽게 발견되니 않았으며, 원래 프랑스에서 자전거에 모터를 달아 개발된 모페드가 미국인들에게 어필되지 않았고, 미국의 수퍼마켓 어디에서고 발견되는 일회용 제품들이 유럽의 문화권에서 와전히 수용되니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한국에서 개발된 김치 냉장고가 다른 문화권에서보편화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세계적으로 식생활 문화가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다시말하자면, 디지털 사회에서 세계는 점점 더 가깝고 좁아지는 반면, 그 나라의 특수한 문화적 토대까지 변화하기는 힘들다는 것이다. 한 나라의 문화는 그 시대, 그 장소를 대표하는 생활이며, 남들과 차별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디자인은 점차 친환경적인 면을 고려하게 되었다.
이는 지금도 중요시 여겨지는 부분으로, 지구 온난화, 오존의 파괴등 기상 이변과 함께, 사람은 항상 자연과 벗을 이루어 살아야 한다는 개념이 전 세계적으로 보편화 되고 있는 추세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이 자연을 좀더 소중이 생각하게 되고, 인간과 자연 생태계에 대해 경종을 울릴 만한 것을 찾는 시대에서 디자인역시 자원, 재활용, 값싼 대체 소재의 개발, 폐기 처분 등의 문제에서 동떨어 질수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현재의 자연 파괴적인 것들에 대항하여 친 환경적인, 자연적인 방향을 중시하게 되었다.
다섯째, 미세 전자 공학과 신소재 개발의 도움으로 디자인은 그 범위와 활용범위가 더욱 넓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일부 영역에서는 제품 디자인과 그래픽 디자인 사이의 EH는 디자인과 회화, 조각 사이의 차이가 모호해지고 있다. 과학의 발달, 첨단 소재의 발달로 인해 대부분의 제품이 소형화 되고, 기술의 보편화가 이루어짐에 따라 디자인은 더욱더 질을 생각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기술의 동질화는 디자인의 차별화로 인해 커버될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기업들은 똑같은 물건을 만들더라도 종전과는 달리 인터페이스와 외관에 좀더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다. 남들과 다른 느낌의 디자인을 찾으려는 노력은 결과적으로 수공예와 회화의 개념을 도입하게 되고, 또한 종전의 잘 다듬어진 강철의 의미지에서 벗어나 개성이 있는 모습으로 거듭나게 된다.
위의 제시한 내용들은 디자인의 목적이 과거와 같이 맹목적이고 무감각한 인공물 환경을 제공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또한 디자인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가장 절묘한 화합과 공생을 예견하는 균형 감각과 함께 인간 내부의 개성과 추억, 혹은 환희등의 생명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활동임을 말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항상 문화의 틀 안에서 존재하여, 문화와 긴말한 연관성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가장 그 시대 문화를 잘 반영하고 또한 잘못된 것에 대한 비판 정신이 디자인에 실릴때, 그것은 시대를 대표하는 디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흔히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디자인에 철학이 배제되어 있다고 말한다.
단순히 선직국형 디자인의 겉모습만을 흉내내고, 기술에 의존하여 디자인에 대한 심오한 연구가 선행되어 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문화는 스스로 만들어 나가는 것이지, 단순히 다른 문화권을 모방하는 것은 짧게는 성공을 거둘수 있으나, 결국 자신의 진정한 모습, 남과 다른 특별함을 찾을 수 없는 딜레마에 빠져들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지금부터라도 디자인의 미래를 예측하는 넓은 식견과, 우리 고유의 디자인 트랜드를 만들어 나가는데 주력해야 할 것이다.
한국적인 미, 이것은 우리나라를 상징할 수 있는 중요한 문화적 요소이다.
하지만, 너무 지나치게 자국의 문화만을 강조하는 것은 독단적인 방향으로 흐르기 쉽다. 개성이 있으면서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이 만들어 지기 위해서는 이 중요한 핵심 요소에 철학이 수반된 독창적 요소가 가미되어야 한다. 이때, 우리나라의 디자인은 경쟁력을 가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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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원용진, [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 – 한나래, 1996
민경우, [ 디자인의 이해 ] – 미진사, 1995
원용진, [ 대중문화의 패러다임 ] – 한나래, 1996
김민수, [ 21세기 디자인 문화 탐사 ] – 솔, 1997
경노훈, 윤민희 [ 디자인 문화와 생활 ] – 예경 ,1999
기타 사이버 조선일보,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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