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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매니저, 존 르 카레

나이트 매니저, 존 르 카레

 

 

* 오래 된 책이라 국내 이미지는 없고, 아마존 사이트에서 빌려온 이미지 입니다.^^

93년에 출판되고 94년에 번역되어 ‘사민사’에서 출판된 존 르 카레의 첩보 소설. 온라인 서점에서도 교보나 예스24에서는 검색이 안되고 알라딘에서만 품절로 뜨는데, 병원 서가에 환자 대여용으로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반가운 마음에 염치 불구하고 빌려와 휴가 때 읽다. 번역은 그리 좋지 않아서 미묘한 상황에서의 정황 변화를 짧은 대화나 디테일 한 두 가지로 표현해내는 르 카레만의 능력이 잘 표현되지 못했고, 잘 이해되지 않는 장면들도 몇 개 있다.

 

르 카레의 대표작은 아무래도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일 것이다. 훌륭한 첩보 소설은 리얼리티를 하나도 훼손하지 않고도, 전쟁에 대한 비난 한 마디 없이도, 그대로 훌륭한 반전反戰 소설이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이 놀라운 소설을 읽고 완전 감동한 나는, 그대로 분식집으로 달려가 카레덮밥을 시켜먹은 적이 있다.(뻥이다. 그치만<추운 나라…>에 이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에도 나오는 스마일리에 반해서, 아직도 그처럼 넥타이의 안감으로 안경을 닦고 있다는 것을 고백해야 겠다. 약 두 달 전 눈이 나빠진 것 같아서 안경점에 들렀더니, 직원은 나에게 형광등에 반사되어 빛나는 안경알 위의 엄청난 흠집들을 보여주며 “대체 안경을 뭘로 닦으신 거에요?라고 물었다.)

 

소설은 냉전이 종식된 이후, 적이 사라진 자리에서 정체성을 잃고 당황하며 새로운 적을 찾아 헤매는 영국과 미국 정보부의 모습들을 보여준다.(적과 내가 서로를 비추어주고 있었음을, 나를 규정해왔던 것은 적이었음을, 그러니 내가 죽여버린 것은 나였음을 발견하는 이 상황은 필요할 때마다 서로를 팔아먹으며 권력을 유지하는 북한의 집권층과 우리나라 극우세력들을 우선 떠올리게 만들지만, 이는 ‘타자가 욕망하는 것을 욕망하는’ 라캉식 주체의 근본 구조가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를 지젝은 딸기케이크를 먹는 아기를 예를 들어 설명했는데 이를 대략 요약해보면 이렇다; 아기가 딸기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다. 그러나 아기가 ‘실제로’ 욕망하는 것은 딸기 케이크가 아니라, 딸기 케이크를 맛있게 먹는 아기를 좋아하는 어머니이다.) 그리고 이는 그가 평생 써 내온 소설의 소재가 사라진 자리에서 어쩔 줄 몰라하는 르 카레의 모습과도 겹쳐진다.(르 카레는 실제로, 소설가로 데뷔하기 전 영국 스파이로 활동했다.)

 

그리하여 르 카레가 찾아낸 소재는 다국적 무기 판매상과 소위 ‘민주국가’들 사이의 검은 커넥션이다. 조나단 파인이라는, 영국 첩보부대 출신이자 스위스의 한 호텔에서 ‘나이트 매니저’로 일하는 영국인을 주인공으로 르 카레는 무기 판매상과 미국 CIA, 영국 정보부 간의 은밀한 결탁과 어두운 거래를 파헤친다. “웅장한 스케일, 놀라운 디테일, 치밀한 묘사”와 같은 수식어구들은 잘 쓰여진 첩보 소설이라면 어떤 소설에라도 별 저항감 없이 붙일 수 있을 터이지만, 르 카레의 소설을 그만의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이를 넘어선 치밀한 캐릭터의 구축과 미묘한 감정 묘사이다. 고아로 자라 몇 번의 상처를 겪으며 자신의 침으로 자신만의 고치를 잣고, 그 안에 들어앉아 어두운 호텔문을 응시하는 일로 아무런 빛깔 없이 살아온 주인공이 사건에 휘말려 들며 스스로의 정체성을 찾아가고 마약 밀매상 로퍼의 여자 제드에게 스스로를 열어나가는 과정은 그 것만으로 한 편의 성장 소설이 된다.

 

소설은 르 카레의 초기작에 비하면 확실히 느슨하고, 클리셰들도 많다. 그러나 르 카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동네 도서관을 뒤져 빌려보는 수고를 무릅쓸 이유는 충분하다. 마지막으로, 로퍼의 체포라는 목표를 향해 줄달음치는 핵심 줄거리의 배면에, 제드를 향한 조나단의 욕망이라는 또 하나의 줄거리가 평행하게 진행되고 있음을 지적해 놓자. 조나단이 제드를 처음 본 순간 느끼는 것은 ‘미칠 것 같은 욕망’이며, 로퍼의 별장에서 조나단은 무기 밀매에 대한 정보를 찾는 만큼의 열정으로 제드의 육체를 집요하게 응시한다. 르 카레는 노련하게 로퍼의 체포가 가까워지는 만큼, 조나단이 제드에게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데, 이는 단순한 정의구현만으로는 아무래도 플롯의 흡인력이 떨어질 것임을 알고 있는 노련한 소설가의 본능일 수도 있을 터지만, 피터 브룩스가 지적한 대로 ‘궁극적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의 육체’라는 근대소설의 문법을 충실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더 이상 이야기하면 스포일러가 될 터이니 그만 쓰자.

#더 읽을 거리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 존 르 카레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존 르 카레
-<육체와 예술>, 피터 브룩스
-<삐딱하게 보기>, 슬라보예 지젝

http://onbooktv.co.kr/bbs/board.php?bo_table=review&wr_id=80&sfl=&stx=&sst=wr_hit&sod=desc&sop=and&pag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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