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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천박한 소설, 있는 그대로 껴안아라!

[프레시안 books]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

조효원 문학비평가·번역가

기사입력 2013-06-14 오후 6:36:58

 

이제껏 자신의 독자들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설은 없었다.

“너는 나를 찢고 불길 속에 집어던지고 다른 책들과 마구 뒤섞어라. 나의 포용력은 너희들의 더러운 죄의 웅덩이를 산 속에서 솟아나는 맑은 물로 바꿀 만큼 강인하단다.”

로베르트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안병률 옮김, 북인더갭 펴냄)는 독자를 최상의 한계경험에 빠뜨리는 카프카 소설 같은 극소수의 작품들을 제외한다면, 소설 장르가 도달할 수 있는 지평을 무참히 파괴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소설의 이념을 보존한 유일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도대체 오늘날 소설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흥행 영화를 요리하기 위한 재료, 무료한 저녁 시간이나 애매한 휴일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심심풀이 땅콩, 잉여인간의 비참함을 잊게 해주는 약한 마취주사에 지나지 않는다.

▲ <특성 없는 남자>(로베르트 무질 지음, 안병률 옮김, 북인더갭 펴냄). ⓒ북인더갭

그러나 애초에 소설이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사교계에서의 명성을 획득하기 위해 흥행시켜야 했던 물건, 오직 대화를 이어나기기 위한 목적에서만 차용되던 살롱의 이야깃거리,신경쇠약으로 고생하던 부르주아의 불안을 잠재워주는 부드러운 안정제에 지나지 않았다. 소설에 대한 고급 비평가들의 칭찬과 기대와 칭찬은 대개의 경우 치장과 허세의 다른 이름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대중소설이나 장르소설과 대비되는 의미에서 운위되는 ‘본격소설’이란 이름은 우스꽝스럽다. 소설은 본디 천박하고 흉물스런 장르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소설에서 우아한 리듬이나 고결한 사상 따위를 찾으려는 시도는 한낮에 등불을 들고 거리를 쏘다니는 행위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런데 카프카의 동시대인 무질은 미완성 유작을 통해 소설 자체의 천박성과 흉물스러움을 형식의 문제로 껴안음으로써, 카프카가 이룩한 성취를 그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냈다. 그렇고 그런 수많은 소설들이 더없이 안일한 시간 표상과 더할 나위 없이 적당한 소재와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만 특이한 인물들을 이렇게 저렇게 뒤섞고 짜깁고 뒤바꾸는 방식으로 생산되는 거라면, 그리고 반대로 소수의 파격적인 소설들이 어지러운 형식과 과격한 소재와 지나치게 특이한 인물들을 통해 소설 장르를 현기증 나는 카오스로 몰아넣는 데만 열중하고 있다면, 이 두 극단으로부터 한없이 멀리 떨어진 어떤 중간점에서 무질의 <특성 없는 남자>는 섣불리 형식을 뒤엎으려 하거나 소재와 인물의 독특성으로 세간의 이목을 끌려는 얄팍한 욕망을 철저히 거부함으로써 탄생한 존경할 만한 절제의 산물이다. 요컨대 무질의 이 소설은 소설 장르 자체의 천박하고 흉물스러운 성격을 숨기거나 짐짓 그럴듯하게 포장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특성 없는 남자>의 특징을 평범한 미덕 가운데 하나인 솔직함에서 찾으려 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이 소설 장르의 태생적 한계만을 상대로 결투를 벌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특성 없는 남자>는 격렬한 항의의 제스처를 쓰지 않고도 제 종족의 뿌리 없음을 비할 데 없이 철저하게 드러냄과 동시에 소설의 뿌리 없음이라는 사태와 연관된,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더 큰 맥락을 문제 삼는 작품이다.

소설이 저열하고 흉측한 것은 인간을 가장 닮은 장르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떤 장르도 이 점에 있어서는 소설에 필적할 수 없다. 이른바 ‘본격소설’들이 아름답고 감동스러우며 때로는 재치 있는 스토리로 이른바 ‘휴머니티’를 짐짓 고양시킬 때조차, 소설 장르가 지닌 저급한 인간성의 면모는 결코 가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로 그렇게 꾸미고 가리려는 습성이야말로 가장 문제적인 인간성의 한 측면이기 때문이다. 비교적 뛰어난 ‘작품성’―예술 분야에서 이 말만큼 모호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을 인정받는 소설들이 많은 경우 모종의 특이한 면모를 지닌 인물을 설정하고 그에 상응하는 상황의 절묘한 복잡성을 연출해내는 경우 역시 다르지 않다.

무질은 전혀 다르게 쓴다. 이 작품의 제목부터가 그런 설정에 대해 단호하게 저항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특성 없는 남자>의 삶에 대한 무질의 예고를 들어보자.

“특성을 소유한다는 것은 현실에서 어떤 확실한 기쁨을 보장해주는 것이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자신 스스로에게조차 현실 감각을 부여하지 않았던 어떤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스스로를 특성 없는 사람으로 간주하는 진행과정을 지켜보아도 될 것이다.”(28쪽)

그러나 지켜보지 않아도 된다. 우리는 그저 <특성 없는 남자>의 이런저런 단편적인 생각들을 우연의 질서에 따라 슬쩍 슬쩍 훔쳐보기만 해도 된다. 왜냐하면 이 소설에서는 다른 데서라면 실로 핵심적이었을 사건의 연속이나 갈등의 파국 따위는 거의 아무 역할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심지어 주변적인 언급처럼 보이는 짧은 진술 속에 주인공 울리히의 ‘특성 없는 남자’ 되기 과정이 더없이 탁월하게 압축되어 있는 장면을 목격할 수도 있다.

“울리히가 마치 성경에서 했던 것처럼 집을 꾸미려고 했을 때, 그는 원래부터 바라왔던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는 거의 폐허나 다름없는 작은 재산을 자기 마음대로 새로 고치는 즐거운 상황에 점점 몰입해갔다. 스타일이 고상한 것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분방한 것까지 어떤 규칙을 선택해도 무방했으며, 아시리아에서 큐비즘까지 모든 스타일을 고려해보았다. 무엇을 선택해야 할까? ‘현대인은 병원에서 나고 병원에서 죽는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병원에 있는 것처럼 살아야 한다!’ 이렇게 이전의 어떤 건축가가 주장한 적이 있었고, 다른 실내장식 분야의 개척자는, 사람들은 고립된 채 떨어져 살기보다는 서로 같이 살면서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하므로, 움직이는 벽을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한 적이 있었다. 그때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고(그건 언제나 그러하므로) 새로운 스타일을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울리히에게는 다행스럽게도, 이미 말했듯이 이 저택에는 세 가지 양식이 섞여 있어서, 사실상 새 시대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만족시키기는 어차피 불가능했다. 울리히의 머릿속에 언젠가 예술잡지에서 몇 번인가 읽었던 다음과 같은 구절이 맴돌았다. ‘당신이 어떻게 사는지 보여주세요,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문구를 철저하게 연구해본 뒤, 울리히는 자신의 개성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가야겠다고 결심하고 미래의 가구들을 직접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육중한 표현양식을 떠올리자마자, 그 대신에 기능적이고 아주 날렵하고 실용적인 양식을 사용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가 힘이 쇠잔한 듯한 철근콘크리트 형식을 스케치했을 때, 그는 봄같이 가냘픈 열세 살 소녀의 모습을 떠올렸고, 결정을 내리는 대신 꿈을 꾸기 시작했다.”(31~32쪽)

▲ 소설가 로베르트 무질. ⓒWikimedia Commons

건축가나 실내장식가와 달리, 다시 말해 특성을 갖고자 하는 다른 모든 사람과는 달리, 울리히는 모든 스타일을 신중히 고려하고 모든 양식을 철저히 연구하여 직접 스케치하지만 결코 결정을 내리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특성도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그의 집은 생각 속에서는 ‘성경에서 했던 것처럼’ 꾸며져야 했으나 실제로는 병원처럼 장식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명 마냥 병원 같지는 않을 것인데, 왜냐하면 지금은 새로운 시대이며 새로운 시대에는 열세 살 소녀를 비롯한 많은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야 하므로 그의 집은 또한 움직이는 벽을 가지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특성 없는 남자의 집은 모든 특성을 고려한 뒤 특성 없게 지어진 집인 것이다.

이것을 현대식 이데올로기의 무자비한 선동 구호 중 하나인 ‘몰개성’의 소치로 보아서는 안 된다. 무릇 개성이란 다른 모든 특성과 구별되는 또 하나의 (새로운) 특성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울리히가 사는 집과 울리히가 사는 삶은 특성의 질서를 벗어나 있거나 적어도 벗어나는 과정 중에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생의 방법을 ‘탈정립(Entsetzung)’전략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삶을 지배하는 모든 특성은 우선 ‘정립(Setzung)’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성의 정립 과정은 거의 예외 없이 외부로부터의 강제를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현대 세계의 가장 큰 세력 중 하나인 언론에서 ‘몰개성’이나 ‘획일화’를 떠들어대는 것은 실로 실소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모든 특성은 애초부터 ‘정립’이라는 단 하나의 방향만을 따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특성을 지향하는 모든 인간은 언제나 이미 정립의 거미줄에 묶여 있는 셈이다.

<특성 없는 남자>가 이 거미줄로부터 자유로운 나비인지 아니면 한층 더 강력한 거미줄을 뿜어내는 독거미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울리히 자신은 어쨌든 정립이 아닌 탈정립의 방향을 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울리히식 탈정립에 대한 묘사를 읽어보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수다한 개인적이고 세세한 부분들을 무시하고 세계를 이미 만들어진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편안할 뿐 아니라 안정된 일이다. 그리고 보수파뿐 아니라 모든 진보파와 혁명파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거기에는 어떤 논쟁의 여지도 없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그들 자신의 개성대로 사는 사람들에게 깊고 어두운 불쾌감을 던져준다고 봐야 한다. 울리히가 종교 건축물의 기술적으로 훌륭한 부분들을 뛰어난 감식안으로 살펴보고 있을 때,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서 인간은 저런 기념물을 서 있게 할 만큼이나 쉽게 사람들을 삼켜버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그 곁의 집들, 그 위의 창공, 눈길을 사로잡는 선과 공간의 뛰어난 조화,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의 외모와 인상, 그들의 책들, 그들의 도덕들 그리고 거리를 따라 난 나무들…. 그것들은 스페인식 벽처럼 뻣뻣했고 절단기에 잘린 측면처럼 딱딱했으며, 완벽하고―달리 표현할 말이 없으므로―완벽하며 완성돼 있어서 사람은 그저 이미 내뿜어져 신이 더 이상 소유할 수 없는 작은 숨결 곁에서 떠다니는 안개일 뿐이었다. 그 순간 울리히는 특성 없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231~232쪽)

이렇듯 울리히가 스스로를 신의 작은 숨결 곁에서 떠다니는 안개로 응축(Reduktion)시킬 수 있는 것은, 그의 전략이 ‘가정(假定)적으로 살기’라는 지침 아래 수행되기 때문이다. 이미 어린 시절에 울리히는 작문 숙제를 하며 노트에 이렇게 썼다.

“아마도 신 또한 그의 세상에 대해 가능한 가정법으로 말하는 것을 가장 좋아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신은 세상을 창조했고, 그것이 다르게 될 수도 있었을 텐데,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29쪽)

언제든, 어디서든, 무엇을 보든, 어떤 일을 겪든, 항상 ‘다르게 될 수도 있었을 텐데’를 떠올리는 것, 이것이 울리히의 탈정립이다.

“이렇듯 울리히는 세상 밖에 있다가 되돌아왔고, 금세 다시 세상 밖에 있는 듯 정착을 했던 것이다.”(34쪽)

“그 후 울리히의 지적 능력이 좀 더 성숙된 이후에 그것은 더 이상 ‘가정’과 같은 모호한 단어가 아니라 확실한 근거를 가진 고유한 개념인 ‘에세이‘와 연결되었다. 여러 장으로 끊어진 에세이에서 사물은 총체적이 아니라 여러 측면에서 관찰되며―왜냐하면 전체적으로 파악된 사물은 한 번에 전망을 잃어버리고 하나의 개념 속으로 녹아버리기 때문에―그렇게 해야 세계와 그 자신을 올바르게 바라보고 대처할 수 있다고 그는 믿었다.”(124쪽)

그러나 지적으로 성숙한 울리히가 서투른 작문을 통해 놀라운 통찰을 제출한 어린 울리히를 능가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에세이를 통해 올바르게 바라본 세계와 심지어 그 자신에 대해서도 그는 여전히 ‘다르게 될 수도 있었을 텐데’를 떠올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울리히의 ‘에세이’가 무질의 ‘소설’보다 우위에 있는 것 또한 아니다. 차라리 양자는 하나의 이념에 대한 서로 다른 이름이라 보는 것이 옳다. 그리고 양자는 공히 그 이름이 아니라 다른 이름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무질은 소설 밖에 있다가 되돌아왔고, 금세 다시 소설 밖에 있는 듯 정착을 했던 것이다.

<특성 없는 남자>에는 세 가지 기념해(年)가 등장한다. ‘오스트리아의 해’, ‘니체의 해’, 그리고 ‘울리히의 해’가 그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는 우리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무질의 해'(2013)다. 그러나 ‘무질의 해’는 무질이 아닌 다른 이의 해가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바로 이 인식이 소설의 새로운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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