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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잠(The Big Sleep, 1946), 레이먼드 챈들러, 하워드 혹스

[깊은 잠(The Big Sleep, 1946)]

 얼마 전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빅 슬립(The Big Sleep)]에 대해 이야기한 데에 이어서 이번에는 이 작품을 원작으로 윌리엄 포크너(옙. ‘그’ 포크너입니다.)가 각본을 맡고 하워드 혹스가 감독을 맡은 누아르 영화의 걸작 [깊은 잠]에 대해 이야기를 해볼까요.원작을 먼저 읽은 이상 원작과의 비교에 가장 중점을 두고 영화를 본 건 어쩔 수 없는 일이겠죠?  일단 작품 자체가 리들리 스콧의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1982)]나 박찬욱의 [올드보이(2003)]처럼 원작의 구조를 기반으로 하여 창조적인 변형을 가했다기보다는 최대한 챈들러의 원작을 살리면서 필요한 부분만 바꾸는 정도였기 때문에 원작만 못하다 어쩐다 하는 소리는 무의미합니다. 애초에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챈들러 원작에서 뿜어져 나오는 맛깔스런 문장의 맛을 영화에서 완벽히 살려내는 건 불가능하죠. [빅 슬립]의 경우, 누아르 영화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주인공의 독백도 들어가 있지 않으니 더욱 그렇고요. 감독인 하워드 혹스가 온갖 장르를 넘나들며 스튜디오 시스템 안에서 흥행 감독으로서 성장한 사람임을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챈들러의 상징적이고 문학적인 쾌감을 추구하기보다는 원작이 지닌 탄탄한 구성과 험프리 보가트-로렌 바콜 커플의 인기를 믿고 만든 대중적인 (아아, 이 표현 싫다. 그렇다고 상업 영화라는 표현을 쓰기도 싫고. 뭐 좋은 거 없나요?) 영화임을 알 수 있을 겁니다. 그 덕분에 협박과 살인이 오가는 이 플롯 속에 엉뚱하게 필립 말로(험프리 보가트)와 비비안 스턴우드(로렌 바콜)의 애정사가 끼어 들면서 정작 원작이 담고 있던 ‘깊은 잠’의 슬프고도 매력적인 이미지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필립 말로의 캐릭터가 가진 정의감도 많이 희석됐고요. 원작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말로의 일장연설은 관두더라도, 중간에 나오는 명대사, “난 먹고살기 위해서 팔아야 하는 건 팝니다. 하느님이 내게 주신 약간의 용기와 지성, 그리고 의뢰인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꺼이 괴로움을 감수하는 열성이죠.”도 빠졌습니다.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카멘 스턴우드의 비중이 매우 취약해졌다는 겁니다. 말로와 비비안의 애정 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사건이 해결되는 후반부에 비비안이 말로의 조력자로서 등장하고, 그 덕분에 말로와 카멘의 관계를 잇기가 힘들어졌습니다. 그래서 전체 사건에서 카멘이 영향을 미치는 정도에 비해서 그 캐릭터가 제대로 드러나질 않았습니다. 말로가 사건의 진실을 이야기할 때 느끼는 건 경악이 아니라 “대체 무슨 근거로?”라는 의아함입니다. 뭐, 그 외 사소한 부분에서의 각색은 제법 좋습니다. (역시 윌리엄 포크너! 라고 성급하게 한 번 말해볼까요?) 원작의 플롯 자체가 복잡한데다가 필립 말로의 독백은 독자에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는 타입이 아니라서 여러 번 입과 머리 속에서 굴려봐야 하는데, 그런 것을 적당히 풀어서 인물들의 대사로 처리해둔 것이 확실히 보입니다. 그런 각색이 전개의 긴장감을 떨어뜨리지는 않으니 성공적인 각색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리건을 비비안의 전남편이 아니라 지난 협박 사건 해결을 도운 수사관으로 등장시킨 건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하긴, 애초에 스턴우드 장군의 리건에 대한 애정도 잘 드러나지 않았으니 아무래도 상관없으려나요. 그러고 보면 결국 영화 [빅 슬립]의 제목은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 정도의 의미 밖에 없는 듯 하군요. ‘원작은 동명의 소설임’이라는 주석 말입니다. 아… 일단 다소 혹평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빅 슬립]은 여전히 마음에 드는 영화입니다. 전체적으로 헐거워지긴 했어도 새로운 사건들과 인물들이 계속해서 엮여 가는 챈들러의 원작이 가진 힘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구성에 대한 독특한 실험은 없지만 흥행 감독답게 전체적인 흐름은 매끄럽고요. 무엇보다도 험프리 보가트와 로렌 바콜의 매력이란! 비록 원작의 필립 말로와는 다르지만 험프리 보가트의 말로 역시 개성이 물씬 풍기는 재미있는 캐릭터입니다. 로렌 바콜의 냉랭하면서도 열정적인 모습 역시 매력이 넘치죠. 두 사람의 관계가 좀 더 자주 표현되었더라면 훨씬 멋진 모습을 보여줬을 겁니다. (물론, 그랬더라면 전체 내러티브는 더 무너졌겠지만요.) 스크루볼 코미디 영화를 통해 다져진 하워드 혹스의 실력은 여기서도 잘 발휘됩니다. 비록 말로와 비비안의 관계가 전체적으로 다소 느슨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장면장면의 힘은 대단합니다. 특히 비비안이 경찰서에 전화를 건 뒤 말로와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경찰을 놀려먹는 장면은 정말 재밌었습니다. 죽이 척척 맞는 커플이라는 게 잘 드러나죠. 두 스타를 흥행요소로 써먹은 건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때문에 내러티브의 허술함조차 용서해주고 싶을 정도니까요. 누아르 영화로서의 [빅 슬립]이 가진 힘은 상당부분 레이먼드 챈들러의 원작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해야 할 겁니다. 물론 야간 촬영이나 실내 촬영의 로우 키 조명에서 얻어지는 칙칙한 누아르적 질감을 빼놓을 수는 없겠지만 기본적으로 누아르 장르가 지닌 음모와 배신, 죽음이 얽히는 복잡한 ‘어두움’은 적어도 이 영화에선 챈들러의 원작에서 비롯되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빅 슬립]의 힘을 폄하할 필요는 없을 겁니다. 이 영화가 폭발적으로 튀는 힘은 없더라도 보기에 큰 불편함이 없는 재미있는 누아르 영화라는 건 사실이니까요. 게다가, 다시 한 번 강조하는 바이지만, 말로와 비비안의 매력은 허투루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라고요. 덧. 현재 출시된 DVD 타이틀은 저 유명한 저작권 개무시 고전 영화 출시사 씨네코리아의 것뿐이라서 하는 수 없이 그걸로 보긴 했는데, 음질을 논한다는 건 난센스고, 화질도 별로 좋은 편이 못됩니다. 화면 중앙에 줄이 그어지는 경우가 허다해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약점은 한글 자막입니다. 몇 가지 부분에서 오역이 있는 데다가 대사 없이 화면상에 시각적으로만 제시되는 협박 편지 내용 같은 건 전혀 자막 처리를 해주고 있지 않기 때문에 처음 보는 사람은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데에 무리가 따를 수 있습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전 저처럼 영어 못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이야기하고 있고요.) 다행히 원작 [빅 슬립]을 읽어뒀던지라 오역과 자막 누락에 굴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영화 내러티브의 헐거움 문제도 있고 하니 역시 원작과 병행해서 감상하시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 by sabbath | 2004/02/15 23:20 | (封) 영화 감상문 | 트랙백 | 덧글(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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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거리 사립탐정 필립 말로우는 퇴역장군 스턴우드 장군의 부름을 받고 그의 대저택을 방문한다. 병환 중에 있는 스턴우드 장군에게는 두 명의 아름다운 딸 비비안과 카르멘이 있었다. 큰 딸 비비안은 도박꾼에 알코올 중독자며 둘째 딸 카르멘은 마약중독자이다. 스턴우드 장군은 둘째 딸과 관련되어 협박하는 사람들에 대해 해결을 해줄 것과 다른 하나는 사라진 리건을 찾아달라고 말로우를 고용한다. 그러나 사건을 조사하던 필립은 협박자 가이거가 서점을 위장해 포르노잡지를 판매한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가이거의 뒤를 쫒던 필립은 우연히 가이거의 피살 현장을 목격하게 되고. 그 범인이 카르멘을 사랑하고 있던 스턴우드의 운전사 오웬 테일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가이거의 죽음으로 필립은 점점 복잡한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카르멘을 협박하던 사진이 없어지자 가이거의 부하였던 브로디는 운전사 오웬을 살해한다. 한 편 사건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필립은 스턴우드의 큰 딸 비비안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지만 그녀에게서 뭔가 석연치 않음을 눈치 챈다. 한편 가이거의 또 다른 심복이었던 카롤은 가이거를 죽인 사람이 브로디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복수를 한다. 필립은 이 모든 거대한 음모의 뒤편에 비밀 도박장을 운영하는 에디 마스가 있음을 알게 되고 조사를 벌인다. 하지만 이미 사건에 너무 깊숙이 개입하게 된 필립 말로우는 큰 딸 비비안으로부터 사건에서 손을 떼라는 협박성 충고에도 불구하고 온갖 사건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살인사건의 범인 추적에 나선다. 에디의 죽음으로 사건은 끝을 맺고, 필립은 카르멘이 에디의 아내와 바람이 난 리건을 질투심에 불탄 나머지 죽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비비안은 이러한 카르멘을 보호하려고 이 진흙탕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음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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